밤에만 익는 토마토 인간
"껍질을 까서 내 속을 드러내는 순간, 그 껍질이 곧 내 허물이 된다."
프런트에서 일하면서 내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힘들게 한 고백이 어느 날, 쟤는 손님을 응대하는 부서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로 이어졌으니까. 그래서 열일곱 명의 선배들과 친해지는 노력보다 일만 잘하자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고, 일적인 문제로만 예, 아니오로 대답했다.
신입이 새로 들어왔는데, 무를 댕강 자른 것 같은 태도라니. 역시나 미움을 샀다. 일이라도 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 했다. 고객 응대 서비스 부서는 전화 응대뿐만 아니라, 예약도 받고, 룸서비스 주문도 포스기에 찍고, 이메일 답변도 해야 하는 업무를 해야 했다. 나에게 맞지 않았다. 멀티 태스킹이 아니라 멀티 띵킹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사고가 속출했다. 스시로 잘 듣고 사시미로 찍기도 하고. 내일 오전 7시에 깨워달라는 손님을, 오후 7시에 깨우기까지 했다.
"손님, 오전 7시 모닝콜입니다."
"네? 저는 지금 티브이를 보고 있었는데."
"죄송합니다. 오홋. 으악. 내일 오전 7시에 모닝콜 신청한 게 맞으신지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
"네. 내일 부탁드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임기응변이 강했다. 얼굴이 불타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태연하게 해서 넘어간 적이 많으니까. 쉽게 생각했다. 전화를 받는 일을. 고객이 빨간 내 얼굴을 보지 않으니, 자신감 넘치게 응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고객을 목소리만으로 응대하니, 쓸데없이 상상을 더 하게 만들었다. 덤덤하게 전화받는 고객의 목소리가 화나기 직전처럼 느껴졌고, 부부가 번갈아 가면서 말을 하면 거의 혼돈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뭐라고 하셨죠? 만 반복하는 앵무새가 되었다.
그랬더니 이제 전화벨이 울리기만 해도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고. 사무실은 내가 전화를 받기만 하면 찬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 조용해졌다. 제가 또 어떤 신박한 사고를 칠까 기대하는 사람들처럼.
입사 7개월 차, 나는 야근으로 유배를 하게 되었다. 낮에는 전화가 많으니, 없던 사고를 만들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자숙하는 의미에서 수양을 하고 오라는 과장님의 지시였다. 만약 야근까지 적응을 못 하면, 다음 해에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없다는 경고와 함께. 문제 그뿐만 아니었다. 야근조는 시니어 선배와 신입이 짝꿍이 되어서 들어가는데, 내가 야근조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도니, 다들 야근조를 안 들어간다고 말했으니까. 말도 안 하는 불편한 후배와 하룻밤이라니. 나라도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배 중 제일 막내 선배와 사고뭉치 내가 짝꿍이 돼서 야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억울해하던 선배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억울하면 더 일찍 들어왔어야지 웃는 다른 선배의 미소까지.
그랬던 나에게 야근조 근무 3개월 차, 선배가 말했다.
"나 팩 하고 있을 테니까. 네가 전화 다 받아."
선배는 귀찮은 듯, 유선 전화를 끄고 눈을 감았다. 나 혼자 받는 전화라니. 떨리고 두려울 만도 한데, 오히려 좋았다.
선배는 그냥 팩을 하기 위해 눈을 감은 것뿐인데, 나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처럼 느껴졌으니까.
야근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맞는 사람이라는 걸. 선배는 내 전화를 끊거나 멈추라고 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면 내가 잘못 안내한 정보에 대해서 말해줬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네가 잘못 안내 나갔으니까. 네가 정정하라고. 낮에는 전화기를 뺏기기에 급급하던 통화를 내가 처음으로 첫 시작과 마무리를 혼자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 것보다 거는 게 더 무서웠으므로, 실수 없이 전화를 응대하고 싶어졌다.
전화벨이 울리면 다시 전화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받을 때 안내 해야 할 정보를 엑셀 파일에 빼곡히 적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마음부터 다 잡았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그걸 못 본다고 나에게 주술을 걸었다. 아무도 네가 토마토가 된 걸 모른다고 생각하니, 흐물거리던 목소리가 단단하게 울렸다. 혼자 전화를 끊고 나니 자심감도 생겼다. 그리고 바로 오늘, 선배가 자신의 메가폰을 나에게 넘겼다. 사뭇 더 비장해졌다.
창문이 없어 어두운 사무실에 쩌렁쩌렁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았다. 얼핏 보니, 센 척 눈 감고 있던 선배의 모니터가 깜빡이다가 꺼졌다. 나에게 전화를 다 받으라고 해 놓고, 아마도 불안해서 내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듯이. 나는 침착하게 안내를 하고 끊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까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안내를 했다.
팩을 덮은 선배는 조용히 고개만 끄떡이고 있었다. 보지 못했지만 팩 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진 않았을까? 네가 이제 혼자서 전화를 받는구나.라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한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낮에는 누군가가 내 전화를 듣고 있는 숨소리가 공포였다. 내 귓가에 날벼락이 떨어질 테니까. 신입이 입사를 하면 교육의 목적으로 선배들은 신입이 받는 전화를 도청을 한다. 그러다가 잘못 안내가 나가면 선배와 나만 들리는 속삭임 기능으로 소리를 지른다. 전화를 받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는데. 정신이 구름 너머로 부양하며 입만 끔뻑 끔뻑이다 보면, 싸늘한 한숨과 함께 너 잠깐 전화 통화 멈춰봐. 가 들리곤 했다.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뒤를 쳐다보면, 나보다 더 얼굴이 빨간 주임님이 두 손을 허리를 짚은 채 나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레스토랑 오픈 시간은 6시 30분인데 6시라고 했잖아. 다시 말해!"
사실 그 목소리에 놀라긴 보단, 그 목소리와 동시에 움직이는 눈들이 무서웠다. 또 쟤야 하는 한숨 소리와 고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 같은 자괴감이 나를 덮쳤다. 반짝이는 낮의 불빛에 상처 난 토마토의 아픔이 타들어 가듯이. 성장이 멈춘 토마토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젠 그 속삭임 기능이 좋았다. 팩을 하며 잠든 한 사람이 뱉는 숨이 다시 나를 숨 쉬게 만들었다. 내가 낯을 가린 게 아니라 낯을 가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벨소리가 멈춘 새벽. 나는 조용히 잠든 선배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깨가 들썩이며 잠을 자는 선배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일 년 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내가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선배, 팩을 떼고 주무세요. 얼굴 쭈글쭈글해져요."
잠들었던 선배는 일 년 넘게 말하지 않던 후배가 말을 걸자, 악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펄쩍 뛰었다.
"어후, 뭐야? 나 얼마나 잤냐?"
"한 한 시간 정도요?"
"... 야. 너 사고 안 쳤지?"
"네. 그럼요. 저희 일 끝나고 밥이나 같이 먹을까요? 직식?"
"좋지. 그런데 너 말하네? 나 너 말 못 하는 줄 알았잖아."
낯을 가렸을 뿐,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었을 뿐. 밤을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에 익은 토마토는 껍질을 벗었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