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목소리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토마토가 같은 토마토를 만났을 때

by 야초툰

낮보다 밤이 좋은 이유는 끝도 없다. 붉은 얼굴을 감출 수 있어서. 밤은 낮보다 조용하다. 무엇보다 밤은 그동안 시커멓게 타버린 마음을 툭하고 내놓게 만든다. 어두운 밤이 되면 숨어있던 카멜레온이 기지개를 켜고 걸어 나오는 것처럼. 부끄러울 필요는 없다. 그 시간에 깨어 있는 모두가 카멜레온이니까.

그래서 예약실에 일했을 때도, 점점 전화받는 일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전화받는 사람과 거는 사람, 둘 사이에 캄캄한 밤이 있으니까. 어둠 속에서 나는 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불편한 사이라면 조금 어색한 사이로 헤어지면 그만이다. 얼굴을 모른 채로 인사를 건네고, 나를 보며 차갑게 식어가는 시선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나에게 밤이 찾아왔다고 상상했다. 목소리만으로는 그 사람을 판단 할 수 없으니까.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저….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못 들었을까 봐.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사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 말씀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자는 깊은숨을 몰아쉬더니 그가 내 목소리를 녹음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했다.

"저는….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번 이 호텔에 전화할 때마다 다른 호텔 객실 가격을 안내받았거든요. 같은 날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전화할 때마다 다른 안내라니. 자신을 우리가 속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게 아니라고 설득해야 했다. 눈을 다시 질끈 감고 대답했다.

"아, 고객님, 객실료는 정해진 가격이 아니라 투숙률에 따라 변동될 수 있어서. 문의하실 때마다 변동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었기에, 단호한 안내에 당황한 듯 보였다. 다행이었다. 그는 아직 더 따질 말이 있다는 말을 웅얼거렸지만, 발음이 뭉개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내가 고객님을 몇 차례 부르고 나서야, 전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 하지만!"

그는 다음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아마도 매번 전화할 때마다 다른 가격이라면, 어떻게 호텔 예약을 하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예약. 그러니까. 요금’이란 단어만 반복했으니까. 그가 말하면 말할수록 어둠 속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얼굴이 붉게 익은 토마토가.

그가 말할 때마다 내는 작은 떨림이 나에겐 익숙했으니까.

편의점에서 산 핸드폰 충전기가 일체형이 아니고 유선 케이블만 있어서, 다시 직원에게 가서 환급해야 할 때 내가 내던 떨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받고 어쩔 줄 몰라서 내쉬었던 한숨. 단체 회식할 때 구석 자리에서 누가 말 걸까 두려워 계속 삼키던 목 넘김.

그는 나에게 더 묻지 못한 채 계속 ‘어떡하지? 그러니까. 그게’를 반복했다. 거울 속에 나를 비추는 것처럼. 끝맺지 못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젠 내가 그런 사람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전화 통화 속 어둠에 익숙해져 전화기를 들고 떨고 있는 사람의 형태를 보게 되었다.

‘나라면 그를 도와줄 수 있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들이마시면서 단전에서 끓어오르던 말을 했다.

"고객님, 그러시면 그 날짜에 가예약을 하는 건 어떠세요?"

"가예약이요?"

"네, 신용카드 번호를 주시는데 실제 예약이 아니라서 결제되는 금액도 없습니다. 그럼, 지금처럼 안내해 드리는 금액으로 예약하시기 때문에 금액 변동은 없습니다. 또 예약은 체크인 하루 전날까지 취소할 수 있으십니다. 가예약으로 예약 진행 도와드릴까요?"

그건 그에게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그 순간만큼은 전화기를 붙잡고 떨고 있던 나에게 한 말이었다. 묻고 싶어도 묻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녹음을 시작했을 테니까. 그는 내 제안에 순간 당황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예약한 금액과 날짜와 예약 번호를 불러주었다. 뒤에서는 선배들이 전화 밀린다고 소리쳤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말도 못 하고 쭈뼛거리고 있던 나에게 손을 내미는 기분이 들었다. 숱하게 절망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달리 가족을 위해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전화를 끊는 그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면 나를 찾아달라고 내 이름을 말했다. 어두운 밤에도 서로를 알아보았듯, 그 역시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길 바라며.

밤이 좋은 이유는 셀 수 없지만, 낯가리는 사람들에게는 어둠 속에 떨고 있는 누군가의 어깨를 토닥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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