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떠나는 날이 왔습니다. 아직 밴쿠버로 돌아가는 날은 5일 정도가 남았지만 서울에 친구들과 친동생이 있어서 서울 구경도 할 겸 조금 미리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KTX는 12시에 예약을 해뒀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마지막 아침이니 전날에 어머니께서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전 그냥 곰탕에 김치면 된다고 말씀드리고 잤는데, 아침에 고등어도 구워주시고 반찬을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두셨더라고요.
"아침에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하셨겠네요. 아들 곰탕 좋아해서 곰탕에 그냥 김치만 먹고 가도 되는데요."
"그래도 아들 이번에 가면 또 언제 볼 줄 알고. 너도 나중에 결혼하고 자식 생겨봐라. 애가 그렇게 말해도 그렇게 밥상 차릴 수 있는지."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도 마지막 아침이라 생각하니 밥이 잘 안 넘어갔습니다. 기분이 이상하고 속이 더부룩해서 밥을 많이 못 먹을 것 같았지만, 일찍부터 일어나서 아침상을 준비해 주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억지로 두 그릇 정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급한 일만 끝내놓고 부산역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캐리어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설거지해놓고 이부자리 정리도 하다 보니 벌써 나갈 시간이 됐더라고요.
집을 나가기 전에 집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천장이 무너지고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벽지도 군데군데 울어있는 엉망인 집이지만 막상 떠나려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시에 저는 떠나는 사람이니 괜찮지만,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셨을 때 제가 없는 빈자리를 느끼실 것 같아서 그게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밴쿠버에서 많은 친구들을 보내면서 헤어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어딘가를 떠난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제 삶 속에서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 마음이 씁쓸했는데 제가 부모님께 그런 빈자리를 남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을 역에서 마지막으로 봬야 하니, 울적한 기분을 최대한 삼키고 즐거운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사람들도 다시 만났고, 좋은 곳도 많이 갔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을 나섰습니다.
'진짜 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울에 도착해서 동생과 밴쿠버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서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주가 흘렀다니. 캐리어를 끌고 택시를 타러 내려가다 보니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동네에 퍼지더라고요.
이른 시간이 아니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동네사람들한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부산역으로 향했고, 부산역에 내려서 역사로 들어가려고 하니 아버지께서 전화가 오시더라고요. 어디쯤이냐고.
저희는 부산역 안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파스쿠찌였나, 카페베네였나. 카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KTX시간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앉을자리가 없더라고요. 커피를 사서 대합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키가 생각이 났습니다. 집 열쇠를 제 키링에서 빼고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냥 가져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차피 다음에 또 오면 쓸건대 뭐 하러 주노. 그냥 가지고 가라."
"지금 키링에 키들이 하도 많아서요. 다음에 한국 오면 그때 또 주시면 되지요."
라고 말씀드리니 마지못해 키를 받으셨습니다. 시간은 야속하게 빨리 흐르고, KTX 시간이 거의 다가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서울 올라가면 연락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한 번씩 안아드리고, 이제 열차 타러 갈 테니 일하러 가십시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건강하고. 서울 올라가면 동생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물론이지요. 어서 가세요. 바쁘시잖아요, 요새."
그렇게 저희는 헤어졌습니다. 멀어지는 부모님의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습니다.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시는 두 분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전화 통화를 잠시하고 열차를 타려고 가려다가, 문득 부모님이 걸어가신 쪽을 봤습니다.
저 멀리에서 아직 절 보고 계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마음이 무너질 뻔했습니다. 이번 여행 내내 들었던 생각이지만, '오늘 보는 부모님의 모습이 앞으로의 모습 중에서 가장 젊은 모습이다'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더라고요.
언제 다시 한국으로 올지 모르지만, 그때의 부모님은 지금의 모습보단 연세도 들으셨을 테고 기력도 쇠하실 테니까요. 부모님께 손을 흔드니까 부모님도 손을 흔들어주시더라고요.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부모님도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KTX를 탔습니다. 남은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서 커피를 못 마시겠더라고요. 화장실에 가서 커피를 다 버리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한동안 부모님을 못 뵈다 보니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많이 무뎌졌었었습니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힘들고, 작아지신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는 게 슬플 줄 알았다면 그냥 출국 전날에 서울에 올라올걸, 그냥 부모님과 시간을 더 보낼걸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한국에 살아도 부모님을 볼 시간이 얼마 안 된다"라고, "그냥 여기서 네가 잘 지내는 게 효도야." 그런 말을 선배님들이나 형 누나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지내는 것보다 밴쿠버에서 지내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었고, 코비드가 터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국에 왔었을 때 부모님과 트러블이 너무 심했어서 이런 가족애를 잊고 지냈었나 봅니다.
제목으로도 한 번 써먹었던 말이지만 요새 재밌는 표현이 있더라고요. '불(꽃) 효자'라고. 제가 부모님께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아무래도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지 못하기에 불효자이지요.
그래도 한국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밴쿠버에서 행복하고 여유롭게 잘 지내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라 생각하기에 '불(꽃) 효자'에서 괄호를 지우고 불꽃효자가 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효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동생을 만났습니다. 일하다가 잠시 시간을 내서 나왔다고, 점심 먹고 자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유명한 식당들은 자리가 없다고 해서 동생 동네 근처에서 점심을 대충 먹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동생이 대문 비밀번호를 가르쳐주고 캐리어를 집 앞으로 옮기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서 다시 일을 하러 갔습니다. 이따 저녁에 술이나 마시자고, 좀 쉬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알겠다고 이야기하고 서울에 있을 때 입을 옷이나 신발 등, 짐을 다시 조금 풀었습니다.
혼자 방에 있으니 그제야 참아왔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잘 도착했고, 동생 만나서 밥 먹고 지금은 동생 집에 와있다...라는 말을 부모님께 전화로 하기 힘들어서 카톡으로 남겼습니다.
여태 찍었던 사진들을 보니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슬프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은데 속에서 끓어오르는, 코 안에서 미간으로 뭔가가 끓어오르는 느낌. 오랜만에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습니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그 여성분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부모님 아직 살아 계실 때 시간을 더 많이 보내요."라는 그 말씀이요.
이번엔 많이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후회 없이 시간을 보내고, 많이 안아드리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많이 배려하고, 고맙다는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별이 더 힘든가 봅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쓴 만큼 이별의 슬픔이 이만큼 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번엔 밴쿠버로 돌아올 때는 후련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엔 진짜 할 만큼 했다."라고 생각하며 웃으며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힘들 줄이야. 이렇게 마음이 아플 줄이야. 그래서 동생이 다시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감정이 터져버렸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