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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드윈 Jun 21. 2024

14화 - 불(꽃) 효자가 바치는 생신상

 

 한국에 온 뒤로 이상하게 늦잠을 잔 적이 별로 없네요. 전날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도 아침엔 일찍 일어나 지더라고요. 그리고 부모님과 항상 아침밥을 함께 먹었습니다. 식사를 차리는 건 어머니께서 하셨지만 뒷정리와 설거지는 제가 했습니다. 왠지 그러고 싶었거든요.


 아침밥을 먹다가 이제 슬슬 부산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부모님께서 먼저, "가기 전에 친구들 좀 더 만나고 가지."라고 이야기를 꺼내시더라고요. "만날 친구들은 다 만났습니다."하고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진짜로 만날 친구들은 다 만났거든요. 뭐 이제 만날 사람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만나려면 만날 사람들이 있기야 했겠지만 그러기 싫었거든요. 만나면 또 술 마실 거고,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이골이 나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고요.


 아침식사를 마무리하고 어머니께서는 먼저 출근을 하시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오셔서 "너희 엄마 다다음주 생일인데, 오늘 당겨서 생일파티 할까?"라고 하시더라고요. 


 솔직히 어머니 생신이 언젠지 잘 몰랐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옛날 사람이라 생일을 양력이 아닌 음력으로 세시거든요. 아버지 생신은 설 연휴 바로 다음 날이라 기억을 하는데, 어머니 생신은 그렇지 않으니 기억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 언제 어머니 생신상 한 번 차려드리겠나 싶어서 알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저녁을 준비해 놓을 테니 아버지는 어머니하고 밖에서 데이트 좀 하다가 늦게 들어오라고 말씀드렸지요. 


 "장보고 하려면 힘들 텐데 차 빌려줄까?"

 "에이, 부산에선 운전 못해요. 차 가져가세요. 알아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고 호기롭게 대답은 했지만 장 볼 생각을 하니 좀 막막하긴 했습니다. 근데 집에 미역도 있고 국거리 용 소고기도 있고, 당면도 있고 재료들은 웬만한 게 있더라고요. 냉장고와 부엌 찬장에 재료들을 확인하고 더 살 재료들을 핸드폰에 적어뒀습니다.

 



 아버지께서 출근하시는 길에 저를 부산역 근처의 전통시장에 내려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시장 가서 장을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지역 경제도 살릴 겸, 시장 구경하라고.


 알겠다고 말씀드리고 차에서 내렸지만, 전 전통시장에서 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엄청 어렸을 땐 대형 마트가 없어서 장을 보려면 시장에 가야 했으니, 그땐 어머니 손 잡고 많이 다녔던 것 같은데 중학생이 되고 난 이후엔 시장에서 장을 본 기억이 없네요.


 일단 대개 현금을 받으시고 카드는 안 받는 곳이 많은 데다 가격이 안 적혀있는 물품들이 많아서 일일이 가격 물어보는 것도 귀찮고, 전통시장에 계시는 아주머님들이 괄괄한 분들이 많으셔서 무섭기도 하고 기가 빨리더라고요. 


 전통시장을 많이 다니셨거나, 사람 냄새나는 곳이 좋고 그런 분들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들은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이 익숙하고 마트보다 싸게 살 수 있겠지만 전 그런 게 쉽지 않더라고요.


 이날도 전 전통시장에 들어가기보다는 대형 마트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금이 없어서요... 그래도 저는 전통시장은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레 전통시장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지역축제와 결합을 하든 국가차원에서 혜택을 주든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지된 유명한 시장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전통시장 역시 한국의 역사이자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니까 후대에 물려줄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후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둘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나 외국 여행 유튜버들을 보면 가끔 백 년이 넘은 식당, 명승지 같은 것들을 소개하더라고요. 그 밑에 달려있는 '한국엔 왜 이런 것들이 없냐?'라는 댓글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한국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보냈고,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한 나라이다 보니 전통을 보존하기보단 옛것을 밀어버리고 새것으로 그 자리를 채워 넣는 식으로 발전을 해왔지요.


 이젠 문화에 대한 인식도 훨씬 좋아졌고, 전통을 지키면서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으니 이런 전통시장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전통시장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게 만드는 대책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말이죠.



 마트에서 불고기용 소고기와 조기 몇 마리, 버섯, 시금치, 당근, 양파를 샀습니다. 오랜만에 마트 온 김에 과일이나 고기, 생선 같은 가격도 확인을 했는데 생각보다 밴쿠버와 가격차이가 크게 나지 않더라고요. 과일하고 고기는 확실히 밴쿠버가 싼 것 같은데 야채류나 생선은 가격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과일은 밴쿠버가 확실히 싸긴 하는데 과일의 당도가 한국에 비할바가 못 됩니다. 특히 딸기류는 차이가 정말 많이 나서 잘못사면 수박의 흰 쪽 부분을 먹는 느낌-친구들끼리 농담으로 무(radish) 맛이다...라고 할 정도로-이 날 때도 있거든요. 한국의 과일이 좀 비싸더라도 훨씬 맛있는 종류도 있으니까, '나쁘지 않은 가격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트 구경도 다 했겠다, 맥주와 소주도 몇 병 사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트 바로 앞에 베이커리가 있어서 거기서 고구마 케이크도 하나 샀습니다. 부모님이 고구마 케이크를 좋아하셔서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재료를 손질하고, 당면과 찹쌀, 미역은 물에 불려뒀습니다. 시간이 좀 남아서 청소기도 한 번 돌리고, 아버지께 언제쯤 들어오실 거냐고 여쭤보니 5시쯤 올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할 것도 없어서 '고려거란전쟁'을 좀 보다가 낮잠을 잤습니다. 한참 자다가 일어났더니 4시쯤 됐더라고요. 

 



 저는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 외국에 있다 보니 유튜브에 올라오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사 먹을 수가 없어서 만들어 먹다 보니 요리를 꽤 하는 편입니다. 귀찮아서 라면이나 외식으로 때울 때도 있지만 웬만하면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 영향이 좀 큰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손 맛이 좋기도 하시지만, 주말에 못해도 한 끼 정도는 직접 요리를 하셨거든요. "너희 엄마는 매일 요리한다고 힘든데 주말에 한 끼라도 우리가 하면서 쉬는 시간을 줘야지. 아니면 밥 못 얻어먹는다." 항상 그렇게 웃으면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런 아버지를 옆에서 보면서 아버지의 요리를 눈대중으로 배웠던 것이 영향이 컸겠지요. 처음 밴쿠버에 와서 살 때도 "생각보다 요리 잘하네?" 하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릴 적에 아버지 옆에서 요리하는 것을 봤던 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더라고요. 


 불린 찹쌀로 찹쌀밥을 만들고, 먼저 잡채를 하기로 했습니다. 잡채에 들어갈 야채를 손질하고, 시금치는 살짝 데치고 잡채를 뚝딱 만들었습니다. 잡채 만든 팬에 소불고기를 그대로 하기로 하고, 남은 야채와 소고기를 넣고 볶아서 소 불고기도 만들었죠.


 국거리 용 소고기를 간장과 참기름에 한 번 살짝 볶고, 냄비에 넣어서 불린 미역과 함께 다시 볶은 다음 물 붓고 간을 맞췄습니다. 조기 굽는 거야, 그냥 중불에 은은하게 껍질이 팬에 달라붙지 않게 잘 뒤집으면서 구우면 끝이지요.


 미역국이 팔팔 끓을 때쯤 부모님이 오셨고, 같이 생일상을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굉장히 좋아하셔서, 기분 좋게 소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네요. 식사를 마치고 가지고 온 생일 케이크를 꺼내서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드리고, 아버지께서도 기분이 좋으셨는지 아껴뒀던 밸런타인 30년 산 위스키를 꺼내오셔서 그것도 마셨습니다.


 뭐랄까,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족과 함께 살거나,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내는 분들에겐 일상과도 같은 풍경이지만 저 같은 외국인 노동자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유행하는 식당에 간다거나, 명소에 가는 것도 너무 좋지만 저에겐 그 무엇보다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전날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도, 아침엔 멀쩡하게 일어나서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아마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제 또 부모님과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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