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데미안이 되기를
이곳에 소개글도 썼었지만, 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정말 좋아합니다. 어렸을 땐 별생각 없이 읽었지만 고등학생 때쯤부터 꽤나 감명 깊게 읽기 시작했지요. 제가 고등학생 때 데미안을 좋아했던 이유는 '나랑 싱클레어가 꽤 비슷한 점이 많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데미안 속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아니더라도 피스토리우스, 베아트리체, 엠마 부인 등등. 그에게 있어 스승 혹은 방황하는 삶의 등불이 되어주는 존재를 많이 만나지요. 그런 싱클레어의 모습 속에서 전 제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땐 '나라는 싱클레어는 3명의 데미안을 만났으니 참 행복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중-고등학생 때 전 취향이 독특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 취향이 아직도 이어져와서 저 역시 범상치 않은 취향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고 로큰롤을 좋아하는 친구, 만화에 환장하는 친구와 책과 영화에 미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세 명이 저라는 싱클레어에겐 데미안이라 생각했던 친구들이었죠. 그중에서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친구는 책과 영화에 미친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었는데 야자시간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영화나 책 이름, 혹은 주인공 이름을 초성으로 쓰고 맞추는 게임을 하곤 했지요.
그러다 전 이과, 그 친구는 문과를 선택해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취향이 워낙 비슷하다 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다시 친하게 지내기 시작해서 아직까지 꽤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나 영화를 접하면서, 이런 매체에 대한 시선이 많이 넓어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저와 그 친구의 취향은 꽤나 달라졌지만, 아직도 재밌는 영화나 책을 보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지요.
오랜만에 한국에 가니 그 친구가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살고 있는데, 굳이 부산으로 내려온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도 연초니 부산에 내려가야 될 것 같다고. 그렇지만 전 대구에 유명한 막창 골목이나 뭉티기를 먹어보고 싶어서 제가 대구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부산 내려갈 거면 같이 내려가자. 대구에서 만나서 술 먹자."
저희가 만난 곳은 동성로였습니다. 동성로의 인상은 '어? 부산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였습니다. 6시쯤 친구를 만났는데 거리에 사람이 그득그득하더라고요. 부산엔 서면에도 예전만큼 사람들이 많지 않던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어쨌든 친구를 7~8년 만에 만났는데 옛날이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만나자마자 대학교 친구들을 만났을 때처럼 하나도 안 변했네, 어제 만났다가 오늘 다시 만난 것 같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1차는 막창집을 가기로 했습니다.
막창과 삼겹살을 시키고 소주를 마시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요. 돈 없던 대학생시절에 친구와 냉동 삼겹살 집에 갔는데, 버섯모둠이 너무 먹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게 15,000원이었나, 여하튼 사 먹기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어서 삼겹살 1인분 하고 소주를 시키면서
"야, 우리 나중에 꼭 성공해서 삼겹살 집에서 버섯모둠 시켜서 먹자." 했던,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 추억이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꺼내니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하냐면서 신기해하더라고요. 막창과 소주를 신나게 먹다 보니 옛날 추억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소주를 한 병 정도 마셨을 때, 제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죠.
"야, 최근에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봤는데 나쁘지 않더라?"
"난 그런 거 재미없어서 안 봄. 요새는 무조건 스펙터클한 거만 찾아봐서 진지한 거, 루즈한 거는 못 보겠더라. 이제 영화든 책이든 재미없으면 참고 보는 게 고역이라."
"야 넌 대학생 이후로 그런 거만 봤잖아. 뭔 요새야."
그러면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동안 서로 보고 재밌었던 감명 깊었던 영화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가장 길게 이야기했던 영화는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 스포팅'이었습니다.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였습니다. 뭐랄까 미친 듯이 방황하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영국 남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일탈과 방황에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했달까요? 영화의 시작에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던 랜튼이 영화의 끝에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굉장히 좋아했지요.
그땐 랜든의 방황이 멋있어 보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만큼의 감흥이 없더라고요. 랜튼이 정신을 차리는 장면도 뭔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고.
"이젠 트레인 스포팅이 멋이 없더라. 괜히 다시 봤다. 다시 안 봤으면 계속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뭐랄까, 첫사랑을 다시 본 느낌. 굳이 안 봤으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텐데."
"난 그 영화를 다시 안 봐서 그런지 몰라도 아직 트레인 스포팅을 좋아하거든. 그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가진 영화를 못 본 것 같고 앞으로도 못 보겠지. 트레인 스포팅은 억지로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거든. 뭐 개연성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그것 때문에 보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 영화는 그 나이 때의 에너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라서, 난 그래서 좋아."
2차는 뭉티기를 먹어보고 싶다고 하니 친구가 잘 아는 곳이 있다고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식당이라기보단 약간 다방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날은 소를 잡은 날이 아니어서 뭉티기 고기가 없다고 해서 결국 그곳은 나왔습니다.
술도 조금 오르고, 쓸데없는 이야기 하면서 걷다가 그냥 눈에 띈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뭉티기 돼요?" 하니까 있다고 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소주를 두 병 시켜서 각자 따라서 마시기로하고, 뭉티기를 시켰습니다. 뭉티기가 나오기 전 기본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레이먼드 챈들러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레이먼드 카버로 이야기가 바뀔 때쯤, 뭉티기가 나왔습니다.
뭉티기는 육사시미로, 말 그대로 소고기를 회처럼 얇게 포 떠서 먹는 걸 말합니다. 지역마다 이 음식을 다르게 부른다고 들었는데 전 부산 사람이라 부산에선 육사시미-뭉티기 두 단어를 혼용해서 썼던 걸로 기억을 합니다. 양념에 버무려먹는 육회도 좋지만, 이 뭉티기가 그렇게 먹어보고 싶더라고요.
참기름장에 한점 찍어서 먹어보니, 과연 기대했던 보람이 있는 맛이었습니다. 쫀득쫀득하고 담백한 것이 술안주로 딱이더라고요.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사장님이 꽁치를 두 마리 구워주셨습니다.
"총각들, 술 그렇게 마시면서 아무것도 안 먹으면 탈 나. 이거 먹으면서 마셔."
"아,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희 소고기 해장국 하나하고 소주 2병만 더 주세요."
"천천히 마셔. 몸 상하겠다."
라면서 쿨하게 소주를 두 병 더 가져다주셨습니다. 술을 꽤 많이 마셔서 2명을 다 못 마시고, 해장국도 다 못 먹고 나오긴 했지만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이야기가 통하고 취향이 비슷하진 않지만 서로의 취향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친구가 자기 집에 가서 칵테일 마시면서 이야기나 더 하자길래 치킨 한 마리를 싸들고 친구 자취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술을 또 마시면서 내일 아침엔 기억도 못할 이야기를 실컷 떠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취미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참 어려운데 이런 친구가 있음에, 그리고 이 친구를 고등학생 때 만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정말 많이 마셔서 다음날 아침이 걱정이 됐지만,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면 한동안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텐데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만나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