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내일이면 부산을 떠나서 서울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부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부모님께서도 일을 빨리 끝내시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집 청소를 하고, 짐을 챙겼습니다. 항상 한국에 올 땐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 선물을 밴쿠버에서 가지고 오다 보니 막상 밴쿠버로 돌아갈 땐 캐리어가 홀쭉했는데 올해는 따로 선물을 안 챙겼다 보니 돌아갈 때보다 캐리어가 불룩해지더라고요.
한국으로 올 때도 캐리어 무게가 간당간당했는데 돌아갈 때 무게가 초과될까 봐 무거운 짐은 백팩에 넣고 가벼운 짐 위주로 캐리어에 넣었습니다. 캐리어와 가방의 지퍼를 닫고, 지갑이나 여권 같은 중요물품을 따로 들고 다니는 작은 백에 넣으니 그제야 실감이 나더라고요.
저희 집은 제가 농담 삼아 '달동네'라고 하는데, 정말 달동네나 마찬가지인 동네입니다. 중국집이나 치킨집에 배달을 시키면 "아 그까지는 우리 못 올라갑니다. 동네 입구에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내려와서 음식 받아가세요."라고 할 정도였거든요.
요샌 장마철이 되면 구청이나 시청에서 공무원들이 와서 산사태 위험이 있으니 대피하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저희 집에서 5분만 걸어올라가면 바로 산이 나오긴하니, 정말 달동네나 마찬가지지요.
짐 정리를 다하고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봤습니다. 제멋대로 지어진 낡은 건물들, 옥상에 칠해진 녹색 페인트들, 이젠 사람이 살지 않아 무너져가는 집과 담벼락, 지저분하고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이런 곳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다는 게 다시 봐도 신기하더라고요.
너무 싫었던 동네고, 싫었던 집이지만 내일이면 떠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이 동네가 그립다기보다는 이 동네 속에 살고 있는 부모님이 그리울 것이고, 혹여나 이 동네가 떠오르면 부모님이 생각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우울해졌습니다.
3~4시 때쯤 부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이 있냐는 질문에 딱히 없고, 그냥 아무 데나 가자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송도'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거기 케이블카가 들어왔는데 굉장히 예쁘다고 하시더라고요.
송도에 도착해서 케이블카를 타러 갔습니다. 요샌 어딜 가든 외국인이 많아서 내가 한국에 온 건지 밴쿠버에 있는 건지 가끔 헷갈릴 정도더라고요. 티켓을 사려고 기다리는데 제 앞에도 전부 외국분들이었고, 직원분들도 영어를 생각보다 꽤 잘하시길래 놀랐습니다.
바닥이 뚫린 것과 안 뚫린 것 두 개 중에 저희는 안 뚫린 것을 타기로 했습니다. 바닥이 뚫린 것 타봤자 바다만 보일 텐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요. 케이블카는 캐나다에서 이것저것 많이 타봐서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타니까 나쁘지 않더라고요.
케이블카를 타고 송도로 넘어갈 땐 노을이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 풍경도 예쁘고, 케이블카에서 블루투스를 연결해서 노래도 들을 수 있어서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트로트 틀면서 신나게 올라갔습니다.
송도에 도착하니 제 생각보다 훨씬 잘 꾸며놓았더라고요. 주전부리도 많고, 이것저것 꾸며놓은 조형물들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공룡 조형물들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아기들은 좋아하는 걸 보니 뭐 있어도 나쁘지 않겠지요.
등산 겸 산책코스가 있다고 하셔서 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겨울인데도 산책로도 예쁘게 잘 꾸며져 있고, 봄이나 여름에 오면 정말 예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가 거의 다 질 무렵이라 산책로를 다 돌지는 못하고 가까운 뷰포인트에 올라갔습니다. 부산의 전경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부족할진 몰라도 부산 시내와 소나무들이 절묘하게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더라고요.
사진을 찍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또 "저긴 어디고... 저긴 어디고... 저기 예전에 뭐가 있었고.." 하시면서 부연설명을 열심히 해주셨지만, 전 부산의 지리에 대해선 잘 몰라서 "아, 그렇습니까?" 하면서 맞장구만 쳐드렸네요.
사진에선 소나무만 나왔지만 소나무 아래엔 작은 나무들이 가지만 남아있었는데 그 모습도 저는 참 좋았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저게 매실나무라고 하시더라고요. 예전에는 매실이 열리면 사람들이 많이 주웠는데 요샌 그런 것들이 금지돼서 매실이 땅에서 썩어가는 게 아깝다고 하시면서요.
한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들만 가득했지만, 꽃 필 무렵에 오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정말 예쁘다고 하시더라고요.
한국사람들은 예로부터 소나무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계절 내내 푸르름을 유지하는 모습이 한국인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전 소나무도 좋아합니다만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매화, 매실나무가 더 좋은 것 같네요. 스스로를 내려두고 봄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의미의 생기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여름에 혹시나 한국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꼭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앙상한 가지에 꽃이나, 최소한 푸른 잎이라고 맿혀있기를 빌면서.
배도 슬슬 고프고, 날도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집으로 그냥 가기는 아쉽다고 저희 동네에 돼지갈빗집 괜찮은 곳이 있다고 거기서 밥을 먹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케이블카를 다시 타려고 역에 도착했는데 역에도 이것저것 꾸며놓은 게 많다고 하시길래 온 김에 보고 가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젠 정말 깜깜한 밤이 돼서 부산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게, 생각 이상이더라고요. 그리고 옥상엔 여러 조형물들이 많았는데, 조형물들의 테마가 '어린 왕자'였습니다.
송도와 어린 왕자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전 어린 왕자를 굉장히 좋아해서 '잘 올라왔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왕자를 흔히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이야기하지요. 대부분 어렸을 때 읽어보셨거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이야기나 어른에게 멋진 집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 정도만 아실 텐데 한 번 다시 읽어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
아이들이 이해하고 공감하기엔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치는 세상이 조금 어렵다고 느껴졌거든요. 어린 왕자가 여러 행성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어른들의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린 왕자가 여우와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모르는 아이에게 타이르듯이 설명하는 여우의 모습과, 그 여우의 설명이 20대 초반의 저에게는 큰 충격과 감동이었습니다. '애들 보는 동화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좋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었고, 그때 제가 속해있던 독서모임에서 다 같이 읽어보고 연극을 하기도 했었지요.
어쨌든 전 제 감성에 조금 더 젖어있고 싶었지만, 케이블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빨리 가야 된다고 재촉하는 부모님 덕분에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네요. 어린 왕자와의 시간은 다음에 책으로 만나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돌아갈 땐 한 밤 중이었습니다. 트로트도 좋지만 야경에는 류이치 사카모토 선생의 노래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더라고요. 이번엔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의 야경과 케이블카의 불빛이 정말 예뻤습니다.
바다와 모래장에 있던 조형물들이 좀 흉물스러웠는데 밤이 되니 나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전 저런 조형물은 없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왜 한국엔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조형물들이 많은 지 잘 모르겠네요. 설치 비용도 비싸겠지만 유지 및 보수 비용도 꽤 많이 들 것 같은데 말이죠.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보지 못할 부산의 야경을 실컷 감상했습니다. 다음에 또 부산에 오게 된다면 그땐 송도에 다시 한번 오지 않을까 합니다. 제 생각 이상으로 잘 꾸며놓고, 아주 예쁜 관광지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