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에서 출발해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마지막 날이니 소주를 한 잔 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차를 두고 다시 나가기로 했습니다.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저희 집과 가장 가까운 번화가는 '초량 6 거리'입니다. 부산역과 아주 가깝고, 신호등 없이 6개의 길이 교차하는... 뭐랄까 아주 복잡한 곳이죠. 부산에 살 땐 이 말도 안 되는 교차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6 거리를 다시 보니 여기서 사고가 안 나는 게 더 신기하더라고요.
Stop 사인도 없고 신호등도 없고, 그냥 횡단보도가 있을 뿐인데 사고 없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신호등을 만들어 줄 법도 한데 왜 신호등을 안 만드는지 잘 모르겠네요. 길이 6개가 동시에 만나는 곳이라 신호를 만들면 통행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
10년 전과는 다르게 복개천도 생기고, 거리도 많이 정비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작복작한 곳입니다. 남들이 보면 뜨악한 곳일진 몰라도 제겐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곳에 돼지갈비가 유명한 집이 많다고 그러더라고요. 전 이 쪽에서 치킨 아니면 되지국밥, 불백 같은 건 많이 먹었는데 돼지갈비가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습니다. 부모님께서 따라오라고 하셔서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니 돼지갈비 집이 골목 안에 가득하더라고요.
세상에, 이곳에서 거의 10년을 넘게 살았었는데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모르고 지냈다니. "이런 곳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라고 부모님께 말하니까 "너 있을 땐 이런데 못 데리고 와줘서 미안하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밴쿠버로 넘어왔고, 제 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도 동생은 직업 특성상 지역 출장이 잦아서 부산에 두어 달에 한 번씩은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이 돼지갈비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있다고, 동생도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저한테 꼭 가보라고 추천을 해주긴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부산을 떠나기 전 날 밤에 여길 먹게 됐네요.
어쨌든 "죄송해하실 필요 없고, 그만큼 오늘 많이 먹고 갈게요."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더니 오늘 배 터지게 먹자고 하시면서 한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가게는 좁고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미 소주를 많이 드셨는지 가게에서 식사하시는 분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셨더라고요.
저희는 생 돼지갈비 3인 분과 양념갈비 2인 분을 시켰습니다. 소주와 맥주도 시키고, 돼지갈비를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기대를 안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놀랐습니다. 돼지갈비가 이렇게 맛있는 부위였나 싶을 정도로요.
양념갈비는 좀 별로였고 생 돼지갈비가 맛있어서 생 돼지갈비를 조금 더 시켰습니다. 소맥과 소주를 먹다 보니 취기가 올라오고, 내일 부산을 떠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건배를 하면서 부모님 얼굴을 봤습니다. '아직 젊으시구나, 돌아가도 너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예전 모습보다 훨씬 밝으시고 행복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였습니다.
술도 한 잔 했겠다, 솔직하게 옛날이야기들을 좀 했습니다. 예전에 섭섭했던 일들, 아직도 섭섭한 기억들, 이젠 이해하는 것들 등등.
이런 속에 있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사시는지 잘 알고 있고, 그건 전부 저와 동생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하고 싶은 말이 많고 반항하고 싶어도 그냥 꾹 누르고 지내왔었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꺼내면 부모님이 상처받으실 것 같고, 설령 상처받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부모님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거기에 부담을 더 드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옛날이야기이긴 하지만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부모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었는데 이젠 저도 클 만큼 컸고 또 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고. 이번에 밴쿠버로 돌아가면 언제 한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르기에,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가고 싶었습니다.
걱정을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부모님께서는 별 반응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래, 그랬지. 그땐 잘 몰랐어서 그랬었는데 그래도 잘 커줘서 고맙다." 그게 다였습니다.
부모님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으셨지만 그냥 삼키셨을 수도 있고, 그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셨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고 정말 '잘 커줘서 고맙다.'라는 말이 하고 싶으셨을 수도 있겠지요.
부모님의 생각은 모르지만, 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제야 부모님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세상이 나를 내팽개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딱 두 명, 제 부모님은 언제든 제 편이 되어주실 테니까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자는 아버지 말씀에, "오늘 마지막 밤인데 천천히 걸어서 올라갑시다. 가고 싶은 데가 한 군데 있어서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도 알겠다고 하시고 뒷짐을 지신채로 천천히 집으로 향하시더라고요.
제가 가고 싶었던 곳은 저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유치환 우체통'이었습니다. 그곳은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른바 야경 맛집이었거든요. 다만 육거리에서 우체통까지 가는 길의 경사가 엄청 심해서, 부모님께서 굉장히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저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우체통에 도착했습니다. 여전히 경치가 예뻤지만, 고층 빌딩들이 그새 올라와서 시야를 많이 가려버렸더라고요. 특히 부산항 대교를 가리는 두 개의 빌딩이 아쉬웠습니다. 도시가 발전하는 것도 좋고, 고층 빌딩이 많이 올라오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아쉽달까요.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전 개발이나 발전에 대해서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으로는 '아쉽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네요. 개발이 진행되면 자연스레 추억이 사라지고, 저의 추억 위로 고층 빌딩이나 다른 신축 건물들이 생길 테니까요.
저는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오는 사람이니 그런 게 참 아쉽고 섭섭하더라고요. 올 때마다 제가 알던 가게가 없어져있고, 동네가 아예 통째로 바뀌어져 있고, 추억이 있었던 공간이 없어져 있는 것들이요. 마치 언질도 없이 떠나버린 여자친구 같은 느낌이랄까요.
난 아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데 혼자 쌀쌀맞게 변해버린 그런 사람을 만난 느낌이었지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진을 조금 찍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젠 정말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요.
동네 입구에 도착해서 천천히 집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첫날, 캐리어를 달그락 거리면서 끌고 집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달달달, 하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시끄럽지 않을까 조심스레 끌고 올라갔었었는데 이제 내일이면 같은 생각을 하면서 끌고 내려와야겠구나.
걸음을 조금 늦추고 부모님께 먼저 올라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얼굴이 제대로 안 나왔고, 좀 흔들렸고, 전체적으로 망한 사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망한 사진이지만, 어떻게 보면 솔직한 사진이기도 했으니까요.
제겐 후자였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진보다 마음이 울컥해지는 사진이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찍고 나서, 두 번 볼 엄두가 안 나서 걸음을 재촉해서 부모님 앞에 섰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마지막으로 짐 점검을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그날 밤 괴상한 꿈을 꿨습니다. 제 캐리어에서 빈대가 엄청나게 나와서 방역절차 때문에 비행기를 몇 주 동안 못 탈거라는 연락을 받은 꿈이었지요.
꿈을 가끔 꾸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제 생각을 투영한 꿈을 꾼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여러모로, 어떤 종류의 이별이건 간에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