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단어를 곰곰이 곱씹어 본다. 작가 홍인혜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투신'인데, 좋아하는 건 나를 지키며 상대를 애호하는 일이지만 사랑하는 건 나를 허물며 상대에게 무너지는 일이라고.
이 정의에 따르면 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주관이 유독 뚜렷해서일까, 타인으로 인해 내 안의 선들을 지우고 싶지 않다. 우선 대부분의 협업이 시너지가 나기보단 한쪽의 분노를 유발하듯 누군가와 조화를 맞추는 과정은 힘들다. 또 다른 이를 만나 아무리 가까워지길 염원해도 결국 각각 다른 두 명의 사람일 뿐, 합일을 이룰 수 없는데 선들을 애써 흐릿하게 만드는 게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옆에 누가 밀착해도 인간은 실존적 외로움을 해소할 수 없다. 그냥 각자 외로움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운 채 멀리 떨어져 살아가면 안 될까.
과거에도 난 유독 사랑에 서툴렀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더 이상 그에게 몰입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일례로 예전에 잠깐 만났던 연인은 사소한 걸로 마음이 상할 때마다 툭툭 거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문제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몇 번씩 "아니야, 괜찮아"만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짜증 나는지는 직접 겪어봐야 안다. 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은 채 그의 투정을 받아주며 합의점을 찾고, 다음부턴 이런 식으로 감정을 풀지 말라고 부탁했으나 원래 사람의 습관이란 잘 고쳐지지 않기 마련이다. 또 비슷한 투정이 반복되자 난 자리를 뜨기로 결심하며 말했다.
"넌 대화로 네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는 능력이 없어. 그리고 난 네 능력을 길러주는 데 내 인생을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 더 이상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아니, 누가 연인한테 그렇게 말하냐고." 난 얼굴을 감싸 쥔 채 말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거랬는데 난 이해가 안 되면 사랑할 수 없어..." 이처럼 불편한 감정이 치솟아 누군가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종료한 적이 꽤 많았고, 이는 내가 '사랑 불능자'란 걸 말해주는 듯했다. 남들은 모두 관계에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는 유대감 같은 걸 품고 사는 것 같다. 왜일까, 안타깝게도 내 안엔 그게 없다.
심리 서적에선 흔히 나 같은 사람의 문제는 어릴 적 가정에서 건강한 유대감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으며, 마음을 연 뒤 진짜 사랑으로 나아가라고 조언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왜 누구나 반드시 사랑을 지향해야 할까? 식물 중에서도 밀폐형 테라리움 안에 물, 이끼, 모래처럼 기본적인 조건만 갖추면 스스로 잘 자라는 종류가 있다. 애정이랍시고 하루 두 번씩 빠지지 않고 물을 준다면 이는 되레 식물을 상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타고난 기질을 존중하는 것이며, 특정 조건이 아무리 다수에게 좋더라도 어떤 식물에겐 부담이 될 수 있다. 사람도 이와 같아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 그토록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떤 이는 "진짜 잘 맞는 사람을 만나면 다를 것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상대가 아무리 성숙하고 좋은 사람이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밀착해 관계를 이루는 건 불편한 지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언젠가는 딱 맞는 '반쪽'을 만날 거란 허황된 믿음으로 잘 못하는 걸 하고 싶지 않다. 결과가 좋지 않았는데 계속 시도하는 건 끈기있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정신병 증상이 아닐까.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걸 원하지 않으며, 사람이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살아가는 거란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일상을 채운 건 단단한 좋아함이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고, 감각적으로 꾸며진 공간을 좋아하며, 일을 좋아하고, 가끔 만나 일상을 공유하는 친구들을 좋아한다. 굳이 나 자신을 허물지 않은 채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좋아하며 사는 게 요즘 나의 유일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