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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표 Dec 25. 2022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괜찮다

1년 전부터 붙잡고 있던 긴 기록의 에필로그.




"진표야. 가끔 보면 넌 좀 이상해. 넌 보통 사람 기준도 좀 알 필요가 있어."


친한 오빠가 건넨 말이었다. 오빤 종종 "보통 사람은 안 그러는데 넌 좀"이란 표현을 서두에 붙이며 말을 시작하곤 했다. 지금 가고 있는 게 정말 내 길이 맞는지, 노력의 방향이 올바른지, 과연 지금 행복한지 멈춰서 고민하는 날 두고 "보통 사람은 안 그러는데 넌 너무 큰 행복에 집착한다"는 식이었다.


듣기 거슬렸지만 한두 번은 좋게 넘기다가 끝내는 ‘보통 사람’이란 단어 좀 쓰지 말라고 짜증을 내기에 이르렀다. 오빠에게 물었다. “그렇게 보통 사람이 좋으면 길거리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사람을 붙잡고 친구하면 되잖아. 뭘 원하는 거야?” 당황한 오빠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으나 보통 사람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보통 사람...


잠시 생각했다. 보통 사람으로 산다는 건 뭘까? 우선 대입을 준비할 땐 교육 제도에 의문을 품기보단 그 속에서 경주마처럼 달린다. 맘에 안 드는 것들은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바꾸면 된다고 어른들이 말하지 않는가. 학과를 선택할 땐 내가 가진 점수를 ‘환불이 안 되는 문화상품권’처럼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 450점을 가지고 경영학과와 바꿀 수 있다면 400점인 사학과는 거들떠볼 필요가 없다. 환불이 안 되는 50점은 날리기 아까우니까. 취업은 늦어도 27살 전(여자 기준)까지는 해야 하고, 무조건 큰 회사에 가는 게 좋다. 아니면 공무원도 괜찮다. 자기 생각 같은 건 버리고 기업이 좋아할 만한 답안을 외우자. 혹시나 일하는 게 재미없더라도 괜히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위험을 감수하진 말자. 사람들이 일은 다 힘들기 마련이라고 했다. 퇴근 후 취미를 만들면 그럭저럭 하루가 굴러간다. 결혼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다수를 대접하기 효율적인 공장식 결혼으로 간다. 자주 보지도 않는 친척과 부모님 지인으로 대부분의 하객이 구성돼 주인공이 누군지 잠시 헷갈리지만 형식 맞춰 잘 끝내면 됐지 뭐. 아직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자녀 교육이 남았다.


이게 뭐야? 보통 사람처럼 사는 건 엄청 힘들잖아. 게다가 저렇게 살면 자아도, 매력도 없는 인간이 될 것 같았다. 난 궁금했다. 저렇게 날 깎고 다듬으면 성공한 사람도 아닌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다니,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주위의 많은 이들이 보통 사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친했던 오빠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했다. 전공을 살려 대기업에 들어가 큰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사내 행사에서 다른 신입 사원들과 함께 댄스 공연을 했다고 말하는 오빠의 표정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당시 학생이었던 난 높은 연봉에 춤추는 비용까지 포함돼 있단 걸 깨달았다.


대학생 때 활력이 넘치던 오빠는 취업한 뒤로 어딘가 달라 보였다. 외모는 비슷한 것 같은데 반짝이던 눈빛이 힘을 잃어 특색이 없어졌다. 이제 결혼이 목표가 된 오빠는 날 볼 때마다 소개팅을 부탁했다. 딱히 해주고 싶지 않아서 화제를 돌려서 물었다. 오빤 인생에서 해야 하는 거 말고 뭐 하고 싶은 거 없느냐고.


그러자 오빠가 답했다.

"사실은 기자가 되고 싶었어. 근데 졸업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취업을 빨리 못하면 가족들도 그렇고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오빤 아직 20대인데 묘비명이 벌써 보통 사람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두 헤아리는 건 몹시 피곤해 보였다. 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반대로 내가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유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단순히 여행자로 머무는 것과 실제로 살아갈 때 느끼는 게 확연히 다르다던 친한 언니. 후자가 훨씬 매력적이라던 언니는 다이빙 강사로 10개국에서 일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으로 들어온 언니는 돈을 모으고 있다. 비행길이 뚫리면 가족들과 세계 여행을 떠날 거라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해외 생활의 명암을 알기에 저런 생활이 마냥 빛나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니가 부러웠던 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택했고, 살아냈기 때문이다. 다이빙을 하기 전,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살았던 언니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딱히 미련이 없어 보였다.


물론 안다. 삶의 형태란 현실을 꾸역꾸역 버티는 직장인과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는 다이빙 강사처럼 딱 잘리듯 나뉘는 게 아니란걸. 세상엔 안정적인 회사를 오래 다니며 월급으로 삶을 일구는 데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또 사실 보이는 것만으론 모른다. 한국을 떠나 고급 휴양지에 살던 당시 여긴 예쁜 감옥이라고 줄곧 한숨을 쉬던 나를 떠올리자면,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타인이 함부로 평가를 내릴 순 없는 것이다.



중요한 건 자신의 평가가 아닐까.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이자 작가인 신영복은 저서 <담론>에서 버섯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나선 산책길, 버섯 중 하나를 가리키며 저건 독버섯이라고 가르쳐준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은 그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고, 다른 친구 버섯은 그를 위로한다. 하지만 버섯의 마음속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정확하게 자기를 지목하며 독버섯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친구는 답답해하며 외친다. "야,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라고.


책 속에서 작가는 해석한다. '독버섯'은 버섯을 식용으로 먹는 사람들의 논리며,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한다고.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의 이유', 즉 '자유'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자부심 가득한 삶을 꾸릴 수 있다.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내 인생은 과연 자유로운가? 남들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 택한 기준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은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매주 부지런히 7000자 이상의 글을 써서 마감하는 생활을 반복해왔다. 원고를 작성한 유튜브 영상이 조회수 100만을 기록하고, 홍보 콘텐츠를 쓴 몇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차지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삶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포기한 뒤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나의 길 위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확신이 주는 안정감. 그렇다면 안정감은 정규직에서 오는 게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진 상태에서 오는 게 아닐까. 지금의 나를 넘어선 또 다른 내 모습이 기다려진다고 생각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앞으로의 삶은 어떨까. 지금 글 쓰는 프리랜서로 사는 것처럼 재능을 펼치는 삶을 살 것이다. 유시민은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재능'에 대해 색다른 정의를 내린다. 재능이란 남들보다 특출난 성과를 내는 능력이 아닌 바로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란 것. 이에 따르면 살면서 내가 재능을 보인 분야는 강의, 외국어, 글쓰기였다. 모두 언어를 재료로 새로운 세계를 빚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래엔 저 세 가지를 마음에 드는 형태로 만들지 않을까. 다른 일을 해보며 뭔가를 더 잘해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걸 편한 방식으로 해야 결실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에서 그래도 다시 어딘가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보라는 조언을 받기도 했으나, 굳이 잘 못하는 것을 택하는 건 어리석게 느껴졌다.


또 좀 더 나이가 들면 타인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노숙자가 역량을 발휘하는 회사를 만들거나, 교육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것처럼 작게라도 약자를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다. 뭐가 됐든 소외된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단체를 운영하는 게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중년의 삶이다. 약자로서 피해를 입었던 지난 경험은 나를 성장시켰고, 타인의 상처를 봉합한 뒤 함께 나아가겠다는 비전을 갖게 했다.


언니가 말했다. 앞으로 누가 보통 사람이 되라고 하면 "전 보통 사람은 알랭 드 보통밖에 모르는데요."라고 대답하라고. 좋은 말인 것 같아 기록해뒀다. 난 보통 사람보단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를 위해 앞으로도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도 괜찮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순 없을까’라는 단순한 물음에서 시작한 기록을 끝맺으려 한다. 이 글은 나를 지지하기 위해 썼다. 동시에 세상에 존재할 나와 비슷한 사회 부적응자들을 위해 썼다.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이 하기 싫은 건 그만하고,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 마음속으로 무언가 잘못됐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그 소리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니까.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것들을 참아야 한다는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싫은 걸 버티는 데서 당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게 아니고, 꾸역꾸역 버텨야 하는 환경이라면 애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이다. 남들이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이해받으려고 애쓸 필요 없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고, 누가 뭐라고 비웃든 간에 소중한 가치를 마음속에 꼭 품고 지켰으면 좋겠다. 살면서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쉬운 게 있었다면 이 책을 덮은 뒤 작게라도 시작했으면 좋겠다. 뭐가 됐든 당신이 좀 더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언뜻 보면 전자가 잘 사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후자가 낫다. 그들은 환경에 맞게 자신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에 맞게 환경을 설계하기 때문이다. 난 내 이야기를 썼지만 이건 나만의 일기장은 아닐 터다. 혼자 가는 이들이 많으면 실은 함께 가는 길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0대를 마치며 썼습니다.


'나다움'을 주제로 장편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쓰고, 마음에 안 들어서 틈틈이 고치다가 올해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수정을 완료했네요.


출간을 기획했다가 엎었습니다. 바라던 것처럼 멋진 책이 나온 건 아니지만 이 기록을 통해 훨씬 단단하고 행복해질 수 있었어요. 읽는 이에게도 그 울림이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내용은 다 수정했으니 전체적으로 다듬어 브런치북을 만들려고 합니다. 브런치엔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그것도 정리해야 하고요. 한 번은 작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할까 자문해 봤는데 별다른 것 없이, 삶의 열정과 즐거움을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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