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다툼

「5가지 사랑의 언어」

by 전야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와 함께 하고 싶은 위시리스트가 있었다. 그중 1등은 단연 함께 등산하기였다. 나는 심각하게 내 취향을 벗어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에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운동도, 야외활동도 좋아하기에 등산은 충분히 내가 참여하고 싶은 활동이라고 그녀에게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어느 날 처음으로 함께 등산을 가기로 하였다.


약속 전날 나는 오랜만에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목욕을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컨디션이 조금 좋지 않았는데 등산을 미루자는 그녀의 권유에도 한사코 나는 꼭 가겠다고 하였다. 친구 중 한 명이 사정상 밤늦게 오는 바람에 목욕을 가는 시간이 늦어졌고 목욕을 끝내고 회포를 푸는 시간까지 해서 나의 귀가 시간은 예상시간보다 많이 늦어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약속시간인 오전 9시가 한참 지난 11시 즈음이었다. 그녀에게서 부재중 전화 1통, 그리고 카톡 몇 개가 와있었다. 아, 뭣 됐구나 싶은 생각에 '늦게 일어났다, 미안하다' 등의 카톡을 몇 개 날리고 재빠르게 준비하며 답장을 기다렸으나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었다. 혼돈에 빠진 채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1. 평소에 배터리 충전에 둔감한 그녀의 핸드폰이 방전됐을 수가 있다.

2. 화가 나서 연락을 받지 않으려 일부러 전화기를 껐다.

3. 무엇인지 모를 모종의 사건이 생긴 것이다.


2의 가능성이 높았으나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어 그녀의 집 쪽으로 얼른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초조하게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다.


한 시간 쯤지나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는 그녀의 톡이 왔다. 어제 이야기 중 그녀는 그 당시 개봉한 '미나리'가 보고 싶다고 했고 홀로 등산을 마친 후 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기까지 내 연락을 받기 싫어 핸드폰을 꺼둔 상태였다. 일단 연락이 되어 안심하였지만 문자메시지 만으로도 세상이 얼어붙을 냉랭함이 전해져 왔다. 또 한 가지 난감한 것은 그날 저녁, 멀리서 다른 약속 때문에 우리 집 근처를 오게 된 친구부부와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던 것이다. 아, 이 사달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친구부부와의 저녁 약속은 6시였다. 일단 4시 반 정도까지 그녀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도착하여 넘치는 긴장감과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벽에 걸린 자화상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화장을 하며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왔지만 딱히 반기는 제스처는 없었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왔기에 할 일이 없어 근처에 앉아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과 관련 변명사항을 늘어놓았고 그녀는 알았다는 정도의 반응만, 단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뉘앙스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친구 부부를 만나러 가니 강제로라도 우리 둘은 텐션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메뉴는 땀이 뻘뻘 나고 속도 뻥 뚫리는 낙지볶음이었다. 기본으로 소면이 따라오며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한 번 맛보고 수차례 재방문을 하는 지역 유명 맛집이었다. 상호명에 칼국수가 들어가는 만큼 칼국수도 맛나지만 낙지볶음으로 더 유명한 집이다. 친구 부부는 우리의 픽에 만족하였고 서로의 결혼생활, 연애상활을 공유하며 두 여자들에게 약간은 낯설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상황만 두고 보자면 그녀는 몇 시간 전 화가 났던 사람으로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텐션과 연신 환한 웃음으로 모임에 집중하였다. 그때 나는 그런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한편으론 지금 진짜 화가 풀린 게 맞을까라는 의심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몇 시간의 만남이 종료되고 작별인사를 한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또다시 냉기가 서려있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아, 끝난 게 아니구나.


그녀의 집에서 마주 보고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노트와 펜을 꺼냈다. 응?

차분하지만 단정적인 목소리로 오늘의 우리의 갈등에 대한 알고리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색다른 갈등 해결방식에 나는 신선함을 느끼며 그녀의 변론에 점차 빠져들었다.




여러분, 5가지 사랑의 언어를 아시나요? 게리 체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는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 5가지의 사랑의 언어가 존재하며 사람마다 그 언어들의 우선순위에 따라 사랑을 주고 받는다고 설명한다. 그중 그녀는 상대방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인에게 잘하는 것이고 거꾸로 그것을 받을 때 큰 사랑을 느낀다고 하였다.


나와의 만남 동안 그녀는 나에게 봉사라는 언어로 자신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를 존중해 주고 함께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도 사랑을 느끼고 싶어 했고 그중 하나가 등산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등산이라는 약속을 정하는 과정 중에 내가 크게 몰입돼있지 않은 모습, 그리고 그것이 결국 늦잠이라는 행위를 통해 증명돼버리자 그녀는 자신의 중요시 여기는 봉사가 나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자신만 나에게 봉사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비참함을 느꼈다는 것. 홀로 등산하는 동안, 영화를 보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며 이 일과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고 한다.

사료가 이렇게 살아있다


노트 필기와 함께 이성과 감성으로 쏙쏙 이해가 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미안함과 공감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녀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와 그 감정의 깊이가 어땠을지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이 갈등을 어떻게 이렇게 유려하게 풀어낼까에 대한 감탄이었다. 보통 나는 지난 연인과도 큰 갈등은 없었지만 상대방이 감정적인 포인트를 크게 키워 갈등을 심화시키는 경우에 매우 큰 불편함을 느끼고 그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녀가 화를 내게 된 이유, 그 경과, 그리고 외부적인 상황에서 그 갈등을 드러내지 않은 성숙함, 불만을 드러내는 타이밍, 방식 모든 것이 나에게는 그저 완벽했다.


털렸지만 행복했다랄까. 훗. 역설적이게도 털리고 나서 그녀를 더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사랑의 언어 5가지를 기반으로 더 깊은 대화를 나눠보았다.


나의 경우에는 함께하는 시간을 가장 중요시한다. 정말 물리적으로 근거리에서 함께한다는 표면적인 의미로서도 중요하지만 어떤 나의 세계관내에 상대방이 참여해 있다는 감각이 중요하다.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있더라도 한 팀으로서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사랑의 첫 번째 개념이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각자 다른 언어에 조금더 촉각을 세워 사랑을 주고 받기로 했다. '모국어'가 다른 우리이지만 어떻게 서로에게 사랑을 주는지 이해했기에 점차 부부로서의 여정에 박차를 가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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