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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Jan 26. 2022

나는 이기주의를 성당에서 배웠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난 무종교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내게 종교가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기 말이다. 30대의 나이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간절히 기도해야만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던 때. 그 때 내겐 어떤 종교라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간절히 기도하면 그때의 상황보다 더 나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은 그런 것 같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믿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 같이 주어지는 축복 같은 것 말이다. 그 즈음 나는 성당을 다니며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장애인 복지관에 봉사활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때는 건강히 살아있는 것이 내게 큰 축복인 나날들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봉사를 다니며 힘든도 몰랐던 그 시절, 만약 일이 생겨 못 가게 되는 날에는 죄책감 같은 것도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일 년을 꼬박 봉사를 하며 지냈다. 그 해 연말에 그 장애인 복지관에서는 봉사자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그때는 연말이기도 했고, 남편은 늘 바빠서 아이들과 함께 그 행사에 참여했다. 그게 내 종교생활에 큰 실수였다. 특별할 것 없는 성당의 미사와 비슷한 행사였고, 행사를 잘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다시는 봉사를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봉사자를 위한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수녀님들은 봉사자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해 나눠주고 있었는데, 한 수녀님이 내 아이들에게 ‘너희는 봉사자도 아닌데 여기 왜 참석했냐? 선물은 가져가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울 아이들은 사실 그 선물에 관심도 없었고 그 선물이라는 것도 정말 별거 아닌 선물이었다. 사실 그게 참 다행이기도 했다. 울 아이들이 그 선물에 관심이 있었다면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 사실, 봉사자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려면, 행사장이 아니라 집으로 보내는 게 맞는 것 아닐까?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봉사자에게는 선물을 안주는 것인가? 선물은 마음으로 전달해야하는 게 맞지 않나? 그 선물엔 정말 수녀님들의 마음이 담겼을지... 여러 생각과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에 난 봉사를 가지 않았다. 내가 겪어봤던 사람들의 패턴은 참 희한하다. 정말 사소한 것에 신뢰를 져버리곤 한다는 것이다.


 그때 즈음에 난 첫 세례를 받았는데, 내가 살던 동네의 인구가 많아지며 그 동에 제2성당이 생겼고, 난 강제로 내 집 주소에 의해 처음 다녔던 곳과 다른 새로 지어진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처음 다니던 성당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곳이었는데, 컨테이너로 겨우 간이 시설을 만든 성당이었다.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성당은 자신의 집 주소에 따라 교적지가 정해진다. 나는 아이들이 세례를 받기 전이어서 그 성당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세례를 받으려면 교적지의 성당을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다른 성당으로 다닐 수 있다. 내가 새로 다니게 된 성당에선 교인이 많지 않았다. 둘째 아이가 첫영성체반을 무사히 마치며 일이 생겼다. 그 성당엔 자모회장이 없었는데, 아무도 지원자가 없자 첫영성체반의 부모 중 한명이 자모회장을 하라는 거였다. 나는 예나지금이나 활발한 성격도 아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내가 자모회장이 되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결과였다. 그들의 이유는 이러했다. ‘우리는 나이가 너무 많아.’, ‘우리는 직장을 다녀.’라며, 직장도 다니지 않으며 나이도 어중간한 나를 다들 적극 추천했던 것이다. 그 이후 자모회장을 맡은 일 년 동안 나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을 맛봐야했다.


 성당에선 어린이 미사 때에 아이들에게 나눠 줄 간식이 필요했다. 물론 경비는 성당에 청구할 수 있었고, 나는 매번 어린이 미사 때에 아이들에게 나눠 줄 간식을 준비했다. 물론 봉사자가 나오지 않아 다 사온 음식이었지만, 그마저도 거의 나 혼자 감당해야했으니 그때도 힘들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아이의 할머니가 아이들이 먹을 간식인데 직접 조리해서 먹이는게 좋다고 말했다. 보다 건강한 간식을 먹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엄마들은 그 말에 동의했다. 자모회의 엄마들은 간식 당번을 돌아가면서 하면 된다고 했고, 나 혼자서 반대하는 상황이 생기자, 나를 비난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간식을 성당에서 조리하는 걸로 마무리 짓고, 각자 순번을 정했다. 2주 정도 그렇게 잘 유지되나 싶더니,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거의 일 년 가까이 간식을 만들기 위한 장을 보고, 혼자서 50~60인분의 간식을 만들었다. 물론 가끔 시간이 되는 사람이 도와주기는 했다. 하지만, 결국 그 책임은 모두 내게 돌아왔다. 다시 간식을 사올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기엔 너무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일 년 동안 정말 열심히 매주 간식을 만들었다. 가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할 때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착각하곤 일을 벌이며, 결국 그 책임은 타인이 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 정말 다행인지 계획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른 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다니던 성당에서도 실망스러운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 말은 생략하고 싶다. 그 이후 난 성당에 가지 않는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꼭 제사를 지내야만 조상을 섬기는 게 아니며, 꼭 미사에 참여해야지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난 여전히 천주교 신자이다. 다만, 그 곳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적어도 내겐,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었다.




*종교 자체를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 글을 보고 심기가 불편할 천주교 신자분들의 악플을 감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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