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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Oct 10. 2022

부정적인 내면의 소리



밤과 새벽 그 모호한 경계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다. 마치 오래되어 늘어진 테잎소리나 턴테이블 소리처럼 '치이익'하는 소음으로 시작 되어 그들은 끊임없이 내 귀에 무언가를 조잘댄다. 그들은 내게 후회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 귀에 대고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그럴땐 귀마개도 소용없다. 그건 내 내면의 소리였다.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 시작될 때 난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장 두려운 건 외부의 소음이 아니라 내면의 소음이다. 그건 내 귀를 막는대도 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알수 없는 환청이 들릴 때마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원망했다. 잠이 두려워졌다. 뒤늦게 나는 환각 증세가 기면증의 증상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기면증 환자의 일상은 잠과 불면으로 채워진다. 어느 순간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느 때에는 불면을 떨쳐내지 못한다. 불면과 발작 수면을 거쳐 기면증은 완성된다. 참 눈치도 없이 기면증 환자의 잠이라는 건 의지와는 반대로 작용한다. 밤에는 잠들고 싶어 양을 한 천마리쯤 세고 낮에는 잠들지 않으려 허벅지와 뒷목을 꼬집어댄다. 어쩜 이리 꼬인 인생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늘 잠과의 사투가 익숙해져 스트레스가 극도로 치닫는다. 나는 수능 전날 밤, 아침까지 양을 세느라 시험시간에 통째로 잠을 잤다. 그걸 어느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내게 속삭이는 내 다른 자아에게 내 불행을 덮어 씌울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이명을 지우기 위해 보지도 않는 티비를 밤새 크게 틀어 놓으셨다. 때론 그것으로도 부족해 밤새 술을 마셨다. 무엇이 두려우셨을까.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라곤 요즘 사람들이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는 백색소음 아닌가.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아버지가 내 환청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내 아버지의 이명을 하찮게 보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두려움을 떨쳐내려 마셨던 술이 점점 그 이명을 짙게 했으리라. 젊었을 때부터 계속된 이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테지만, 늘 한결같은 익숙함은 이내 체념을 가져온다. 사실 그 체념의 상태가 더 두렵지 않은가. 소리의 통로를 막았으니 소통이 점점 어려워 진다. 이제 어지간한 작은 소리로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힘들다.


어쩌면 내 아버지는 대화가 단절되는 것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어떤 소리에도 신경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환청과 실제 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던 처럼 말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조롱한다면 귀를 막으면 그만이지만 내 내면에서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아두면 안된다. 흐르지 못하는 감정은 내 마음까지 꽉 채울 것이다.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자연스럽게 지나갈 감정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다.


요즘엔 가끔 누군가가 내게 비난의 소리를 내면, 그건 어쩌면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내면의 소리이든 실제 소리든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소리는 더이상 흘러가지 못할테니 어찌 됐든 다 괜찮다.




"부정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소리는 자연스럽게 흘러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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