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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Oct 02. 2022

될놈될_운명을 믿어보자



나는 운명론자이다.


사람들에게 '운명을 믿어라.'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사주나 점을 먼저 봐야하는 것 아닌가. 혹시 운이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지만 내가 말하는 운명이라는 것은 그런 이 아니다.


20대 초반, 나는 명리학 공부를 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보기만해도 질릴 것 같은 두꺼운 책을 여러 권 쌓아 두고 명리학에 요한 익숙치 않은 한자 공부를 먼저 했다. 그 당시엔 이상하리만큼 학창시절에 하기 싫던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왜 난 학창시절에 수학과 물리만 공부했을까 의문이 드는 순간이 있었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누군가 억지로 시키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공부를 못했던 이유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에 내가 궁금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성향은 천차만별 아닌가. 시키는 것을 잘 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언젠가 어떤 무당은 내게 공부로 성공할 팔자도 아닌데 공부 안하길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돈을 차곡차곡 모아 부자가 될 운명도 아니라며 평소에 하던대로 쓰고 싶은대로 펑펑 쓰라며 독려하기도 했다. _내가 공부 못한 건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앞뒤 생각없이 돈 펑펑 쓰는 건 어떻게 알고?_ 그게 칭찬할 일도 아니었지만 학창시절에 쓸데없이 열심히 하지 않은 내가 잠시 기특했고, 어차피 돈 펑펑 써도 돈 복이 많아 걱정 없다는 소리에 참 안심했다. 그게 내 운명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천주교 신자가 무당집에 간다니 참 의아하지만, 그것도 어쩔수 없는 내 운명었다.







내가 운명론을 믿게 된 건 명리학을 공부할 때가 아니라 최근의 일이었다. 명리학 책에서 '사주팔자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고 할까. 늘 무기력하게 살던 내가 어느날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했을 때, 바로 최근의 일이다. 내 마음가짐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긍정적인 마음 하나로 내가 하는 일도 더 잘 되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 내 운명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나는 더는 우울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했다. 더이상 나는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운명론은 이렇다. 자신의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운명을 믿지 않는다면 매 순간 선택이 고되고 힘겹다. 내 선택으로 인해 내 인생이 바뀔 것 같은, 혹시 모를 잘못된 선택을 할까 노심초사하며 선택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운명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죄책감보다는 책임감을 가지는 편이 낫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 중이라면 운명론을 믿어 보자. 운명론을 믿는다면 인생이 조금 쉬워진다. 운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 자체가 내 운명인 셈이다. 어차피 잘될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잘되고 어차피 안될 사람은 안된다. 내 선택에 의해 바뀔 운명이라면 애초에 그건 운명이 아니다. 잘될 사람 안될 사람을 구분 짓기 전에 자신이 잘 될거라고 믿는다면 운은 좋게 흘러 결국 나는 잘 될 사람이 된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여진다면 좋은 답안지를 구하는 것보다 먼저 자신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할 잘될 운명이라고 말이다.




"떠한 상황에서도 올바른 선택을 할 잘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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