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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Oct 25. 2023

마음속의 서랍장



마음속의 서랍장





현실에 살지 못해요




_ 저는 현실에 살지 못해요. 주로 과거에 살고 때론 미래에 살아요. 어릴 적부터 내게 현실은 없었어요. 현실에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자꾸 후회되거나 불안해요.



 "과거를 잊으면 발전할 수 없다.", "과거를 잊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왜 이 명언들은 다른 말을 하고 있을까. 둘 다 맞는 말이라는데, 대체 뭐가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니까 상황에 맞춰 어떤 일은 잊지 말아야 하며, 어떤 은 잊어야 한다. 그러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현실에 살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자주 잊고, 잊어야 할 일은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었고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망상을 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따라 잊을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해 내고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절대 성공할 수 없을 사람이라고 씁쓸한 결론을 내다.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게으른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가끔 과거에 매몰되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래의 걱정을 하느라 현실에 살지 못한다. 매일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과거나 미래에 살고 있다는 거다. 현실에 산다면 잠이 오지 않을 리 없을 테니까. 현실에 사는 사람이라면 당장 내일의 걱정이 우선일 테니까. 어두운 밤에눈을 감고 잠이 드는 게 현실적인 상황이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오히려 더 또렷이 잘 보이는, 그래서 집의 사소한 티끌이나 정리되지 못한 부조화를 발견해 내고선 이불을 뒤척거리는 건 자연스럽지 못다. 가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주 불면의 밤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불만과 미래의 불안을 짊어진 나는 해결해야만 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외면하고 만다. 오늘을 하루 더 내일로 미룬다고 삶이 크게 바뀌는 건 아닐 테니 오늘만 모른 척해볼까. 선반 위의 공과금 고지서나 창틀의 먼지 청소쯤은 내일로 미뤄도 되겠지. 그렇게 하루하루 해결하지 못한 현실은 자주 미래의 나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미루고야 말 거라는 끊임없는 망상과 함께.







십 년 후에도 이십 년 후에도



_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십 년이나 이십 년 후였으면 좋겠어요. 지금 내가 과거나 미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현실이 불안하기 때문일 거예요. 살면서 단 한 번도 현실이 행복하다거나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누군가가 나를 떠날까 불안하고 걱정돼요. 근데 한 십 년 후쯤엔 달라져있겠죠.



 어릴 적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 엄마가 없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엄마가 목걸이로 매달아 준 집 열쇠를 매일 잊고 책상 서랍에 두었고,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귀가 어두운 친할머니는 손녀가 걱정되어 하교시간 즈음에 마당에서 서성였으나 벨소리를 듣지 못했고, 큰소리로 불러도 대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도, 우리 집 강아지 재롱이가 짖어대도 듣지 못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자면 듣지 못하는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다 내 탓인데도 누군가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대상은 만만한 할머니였다. 나는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서 씩씩거렸다. 그러다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엄마는 어쩌면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상상 속의 미래에는 늘 가족은 없었다. 가족을 부정하면 나는 상상 속에서나마 행복해졌다. 재벌 3세를 꿈꾸거나 드라마에 나온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꿈꾸거나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거나.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실망은 더 커졌다.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을 다시 맞닥뜨렸고, 십 년 후, 아니 이십 년 후쯤으로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 후가 되었지만 성숙해지지 못한 영혼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게 두려웠던 과거의 나는 상상 속에서 그들을 버리고 홀가분했을까. 현실로 돌아오면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겠지. 그러다가 몸만 큰 아이가 되었겠지.



 지금으로부터 십 년 후, 아니 이십 년 후가 되어도 어쩌면 큰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미루다 보면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더 큰 후회로 남을 테니. 으로도 나는 군가가 나를 떠나는 게 두려워서 상상 속으로 군가를 버릴 테니. 이제는 과거의 일을 잊어야 한다. 매일 책상서랍에 고이 모셔두, 내 목에 걸지 못했던 열쇠처럼. 이제 현실을 살아야 한다. 마음속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따로 구분해서 넣어둘 서랍장을 하나 마련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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