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오니어

by 야호너구리

동네에 파이오니어 커피라는 카페가 있었다.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파이오니어. 어감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앞에 서 있는 사람 같았고, 처음이라는 느낌도 났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뜻은 개척자라고 나온다. 처음 길을 내는 사람. 아무도 안 가본 쪽으로 먼저 가는 사람.


가끔은 나도 파이오니어가 되고 싶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한다거나, 아무도 안 해본 방식을 택한다거나. 그런 이야기들 있지 않나.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방향을 정하고, 나중에 사람들이 따라오게 만드는 삶. 생각만 하면 꽤 근사하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앞장서는 쪽보다는 늘 옆에서 보고 판단하는 쪽에 가까웠다. 먼저 뛰어들기보다는, 누가 먼저 가는지 지켜보고, 위험한지 아닌지 확인한 다음에 움직였다. 개척자라기보다는 팔로워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팔로워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만 간 건 아니다. 남들 다 거쳐 가는 길을 나도 빠짐없이 거쳤고, 유행하는 선택지들도 웬만하면 다 밟아봤다. 안정적인 선택, 무난한 경로, 실패 확률이 낮아 보이는 쪽.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을 택했다. 적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아서.


파이오니어 커피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카페 이름처럼 살지는 못했구나. 누군가 길을 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길이 안전해 보이면 그제야 따라가는 삶. 혁신보다는 적응, 도전보다는 참고서 같은 인생.


그렇다고 완전히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개척자는 늘 상처가 많다. 실패를 먼저 겪고, 욕도 먼저 먹는다. 나는 그걸 견딜 자신은 없었다. 대신 남들이 만든 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걸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파이오니어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이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길을 내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 길을 실제로 걷는 사람도 필요하다. 나는 아마 후자 쪽이다. 남들이 만든 지도 위에서, 그래도 내 발로 한 칸씩 움직이는 쪽.


커피를 다 마시고 나와서 다시 간판을 봤다. 파이오니어 커피. 이름은 여전히 좋았다. 그 이름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을 부러워할 정도의 여유는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개척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멈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남들 다 하는 걸 다 해보면서, 그중에 뭐라도 하나는 붙잡아보려는 삶. 그 정도면, 아직은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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