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직 - 3

인수인계는 시작되지 않았다

by 야호너구리

사직서를 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인수인계다.

파일 정리, 메일 정리, 설명해야 할 것들. 누가 와서 무엇을 이어받을지, 언제까지 넘겨줘야 할지. 퇴사의 예의처럼 따라붙는 절차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기다렸다. 누군가 “인수인계 준비해주세요”라고 말해주기를.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내가 너무 성급한가 싶었다. 인사팀이 바쁘다더니, 아직 타이밍이 아닌가 보다 하고 넘겼다. 일주일쯤 지나자 조금 이상해졌다. 인수인계를 안 한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아직 내가 나갈 사람으로 분류되지 않았거나, 나간 뒤를 아직 상상하지 않았거나.


나는 파일을 정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지도 않았다. 아주 조금씩만 손봤다. 폴더 이름을 정리하고, 날짜를 맞추고, 쓸데없이 길어진 파일명을 줄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누가 볼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인수인계가 시작되지 않으면, 준비만 계속하는 사람이 된다.


메일함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메일에는 별표를 달고, 덜 중요한 건 아카이브로 보냈다. 메일 제목을 다시 읽어보면서, 이게 누군가에게 설명이 필요한 내용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도 될 기록인지 분류했다. 설명이 필요한 것들은 따로 메모를 남겼다. 메모의 수신자는 비워둔 채로.


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늘 평소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이거 진행 상황 어때요.” “이건 다음 주까지 가능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인계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내 일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맞았다. 그게 규칙 같았다.


신기하게도, 인수인계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회사에 더 묶어두는 느낌을 줬다.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은 늘 다음 사람을 상상하게 되는데, 다음 사람이 없으면 떠날 상상도 흐려진다. 여긴 아직 종착역이 아니라 환승역이라는 말을 모두가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환승할 플랫폼은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이 회사에서는 인수인계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냥 누군가가 빠지면, 남은 사람들이 조금씩 가져가는 방식. 책임도, 기억도 분산시키는 방법. 그러면 인수인계를 시킬 필요도 없다. 그냥 나가면 된다. 조용히.


그래서 나는 여전히 출근한다.

여전히 일을 하고, 여전히 정리를 미룬다. 인수인계 파일은 바탕화면 한쪽에 폴더만 만들어둔 채로 그대로다. 이름은 단순하다. 인수인계. 그 안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인수인계가 시작되지 않으면, 퇴사도 아직 시작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그렇다.

끝내는 사람보다, 끝내지 않은 상태가 더 오래 유지된다.


나는 오늘도 그 상태로 퇴근했다.

정리하지 않은 파일처럼,

다음 사람 이름이 비어 있는 문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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