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날짜를 적지 않는 이유
사직서에는 날짜를 적는 칸이 있다.
언제까지 근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칸. 대부분은 그걸 가장 먼저 채운다. 마지막 출근일은 퇴사의 핵심이니까. 그날을 기준으로 인수인계가 시작되고,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다.
나는 그 칸을 비워두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문서를 열었을 때, 자연스럽게 아래부터 썼다. 이름, 소속, 서명. 이유를 쓰는 칸에서는 조금 망설였고, 결국 가장 무난한 문장을 골랐다. 개인 사정으로 인한 퇴사. 날짜는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그때는 그냥 나중에 적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메일을 보낼 때도 날짜는 없었다.
첨부파일을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보낸 뒤에야 알아차렸다. 날짜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굳이 수정해서 재발송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날짜를 적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한 날을 쓰는 건, 그날 이후의 자신을 상상해야 하는 일이다. 다음 회사, 다음 출근길, 다음 책상. 나는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까지만 도달했을 뿐이다.
날짜를 적지 않으면, 퇴사는 계획이 아니라 의사가 된다.
언제 나가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나가고 싶다는 상태. 그 상태는 오래 유지될 수 있다. 회사도, 나도, 그 애매함에 익숙해지기 쉽다.
그래서 인사팀도 아무 말이 없었는지 모른다.
날짜가 없으면 처리도 어렵다. 언제까지 근무인지 모르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나는 의도치 않게 가장 미루기 쉬운 형태의 사직서를 낸 셈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사직서를 회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짜를 추가하지도 않았다. 메일함 어딘가에 그대로 있다. 열어보면, 여백이 먼저 보인다. 그 빈칸이 지금의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같아서.
퇴사 날짜를 적지 않는다는 건, 떠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떠날 시간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준비가 덜 됐거나, 용기가 부족하거나, 아니면 그냥 더 미루고 싶은 마음.
이 회사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떠날 생각은 있지만, 날짜는 적지 않은 사람들. 환승역에 서 있으면서도, 몇 시 열차를 탈지는 모르는 사람들. 그 애매한 상태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다.
나는 오늘도 출근했다.
사직서를 낸 사람으로, 날짜를 적지 않은 채로.
아무도 퇴사하지 않는 회사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결정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