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사직 - 끝

사직서는 아직 유효하다

by 야호너구리

사직서는 아직 회수되지 않았다.

메일함 어딘가에 그대로 있다. 날짜는 비어 있고, 이유는 여전히 추상적이다. 그 문서는 처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취소된 것도 아니다. 이 회사에서는 그런 상태가 꽤 오래 유지될 수 있다.


나는 그걸 가끔 확인한다.

보낸 편지함을 열어보고, 첨부파일을 클릭해본다. 날짜 칸의 공백을 본다. 그 여백이 이상하게 안정감을 준다. 아직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서.


사직서가 유효하다는 건, 당장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회사도, 나도, 그 상태를 묵인하고 있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이 회사에는 퇴사자가 드물다.

대신 사직서를 써본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나간 사람보다, 나갈 생각을 해본 사람이 더 많은 구조. 그 생각이 회사 안에 고요하게 퍼져 있다.


나는 아직 출근한다.

아직 일을 한다.

아직 회의에 앉아 있다.


하지만 사직서는 남아 있다.

날짜 없는 상태로, 처리 대기 중으로.

그 문서 하나가 내가 완전히 여기 사람은 아니라는 걸 조용히 증명한다.


이 세계에서는 퇴사가 늦게 온다.

그래도 사직서는 먼저 온다.

그리고 아직, 그건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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