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타자

by 야호너구리

나란 사람은 몇 번 타자일까를 가끔 생각한다. 야구를 좋아하진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이상하게 야구를 좋아한다. 경기보다 기록을 먼저 보고, 승부보다 숫자를 본다. 타율이나 출루율 같은 데이터도 좋고, 징크스나 루틴처럼 설명 안 되는 것들도 같이 붙어 있어서 더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타순은 늘 중심이 아니다. 4번 타자는 부담스럽다. 뭔가를 대표해야 할 것 같고, 결과가 바로 이름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8번 타자가 먼저 떠오른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빠지면 흐름이 꼬이는 자리. 점수판에는 조용히 남고, 경기 전체를 좌우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위치.


중간계투 또는 패전처리 투수도 비슷하다. 마지막 즈음 나오지만 주인공은 아니다. 이미 벌어진 경기를 정리하는 역할. 잘하면 당연한 일이고, 못하면 바로 이름이 불린다. 책임은 분명한데 서사는 짧다. 그 애매함이 싫지 않다.


그러다 머니볼 이야기가 끼어든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하던 선수들, 스카우트들이 고개를 저을 때도 숫자만 남겨두고 다시 보는 방식. 타격폼이 예쁘지 않아도, 발이 느려 보여도, 출루를 한다는 사실 하나로 팀에 남는 사람들. 그때부터 생각이 조금 바뀐다. 눈에 안 띄는 게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쪽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해온 일들도 그랬다. 앞에서 판을 벌이기보다는 뒤에서 정리하는 쪽. 문제가 터지지 않게 막거나, 이미 터진 걸 수습하는 쪽. 잘하면 그냥 넘어가고, 어긋나면 바로 드러나는 자리. 그래서 성과보다 과정이 더 눈에 들어온다. 숫자가 어떻게 쌓였는지, 루틴이 깨지지 않았는지, 오늘 컨디션이 어땠는지 같은 것들.


머니볼이 말한 건 스타가 아니라 쓰임이었다. 잘 보이는 능력이 아니라, 실제로 도움이 되는 지점. 내가 좋아하는 8번 타자나 중간계투도 그 범주에 있다. 팀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쪽이지만, 박수는 크지 않은 자리. 그래도 없으면 분명히 빈칸이 생긴다.


혹시 내가 모르는 나의 가치도 그런 식일까 생각한다. 겉으로는 애매해 보이는데, 숫자로 보면 빠지면 안 되는 역할.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빠지면 일이 더뎌지는 부분. 스스로를 평가할 때도 자꾸 눈에 띄는 기준만 들이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내가 몇 번 타자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중심에 서고 싶다는 생각은 크지 않다. 필요할 때 호출되고, 끝나면 조용히 빠지는 쪽이 편하다. 오늘 경기에 내가 없었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 그게 서운하면서도, 머니볼 식으로 보면 또 다른 방식의 증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이미 좋아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응원하는 팀은 없어도, 이런 자리와 숫자에는 계속 눈이 간다. 혹시 아직 내가 모르는 가치가 있다면, 아마 이런 쪽일 것이다. 점수판 구석에 남아 있는 한 줄. 잘 보이지 않지만, 지우면 경기 흐름이 달라지는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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