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거주 도우미 문화
싱가포르에 와서 자주 들리던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안티'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상대를 싫어하고 공격하다는 의미의 안티(Anti)가 아닌 어른 여자를 통합하여 지칭하는 '이모님'의 개념인 앤티(Auntie)의 싱가포르식 발음이다.
그중에서도 상주하는 가사도우미(헬퍼)를 지칭할 때 주로 많이 쓰이는데 싱가포르에서는 집 안에서 함께 거주하는 안티문화가 일반적이다. 보통 3 베드룸 이상의 아파트에는 주방 옆 화장실이 딸린 헬퍼 전용 방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거의 잠만 잘 정도의 작은 크기라 방 하나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헬퍼를 고용할 때는 이렇게 따로 전용공간을 내어 주는 것이 기본 옵션이지만 그렇지 않은 집주인들도 꽤 된다. 창문도 없는 밤 쉘터(bomb shelter, 전쟁 시를 대비하여 만든 철문으로 되어 있는 창고 같은 공간)를 헬퍼의 거주 공간으로 내어주거나 더 열악한 곳은 주방에 매트 하나 깔아놓고 생활하게 하기도 한단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5년간 베트남에 거주한 적이 있어 나도 동남아의 헬퍼 문화에는 꽤 익숙한 편이다.
당시 나는 막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 중에 남편 발령에 맞춰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낯선 곳에서 육아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한인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엠어이(em oi, 베트남에서 본인보다 나이 어린 여자를 통용하는 말로 보통 헬퍼를 부를 때도 자주 씀)'를 고용하며 지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들이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이제 전업맘이 되었으니 시간도 많아졌고 아이 키우면서 청소하고 밥만 잘해먹고 살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6개월을 넘긴 아이는 여기저기 기어 다니면서 아무거나 입 안으로 가져가려 해서 매일 청소는 기본이요, 이유식을 시작해서 매일 주방 불 앞에서 이것저것 만들고 늦은 오후에는 남편과 나를 위한 어른용 식사 준비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무엇보다 일 년 내내 여름의 나라에서의 하루 청소만 해도(40평대, 방 4개) 온몸의 기력이 쫙 빠진다. 그렇다고 아이를 한 번씩 봐줄 친정 부모님이나 시댁, 이모, 친구들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몇 년간 지내다간 내 몸이 도저히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딱 1년 버티다가 한국에 들어가는 지인의 도우미를 우연찮게 소개받게 되었다. 1년 동안 사서 고생한 정성이 하늘도 갸륵했는지, 헬퍼가 첫 경험이었던 나에게 너무도 성실하고 착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다.
그 길로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와 단 한 번의 불만도 없이 사이좋게 잘 지내게 되었다. 심지어 둘째는 베트남에서 태어났는데 그녀가 청소는 물론 아이 보모까지 자처하며 몇 년간 나의 육아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해줬다. 내가 베트남을 떠나는 이삿날에는 둘이 부둥켜 앉고 엉엉 울기도 했던 추억도 새삼 떠오른다.
하지만 내가 베트남에서 순전히 도우미를 쓸 수 있었던 계기는 매우 싼 인건비(주 5일 4시간, 당시 한 달에 한화 20만 원 수준)와 맞물려 내 생활공간을 지킬 수 있는 파. 트. 타. 임.이었기 때문이다.(나는 내 가정이 있다면 아무리 친정부모님이라도 한 집에서는 못 살 것 같다)
가끔 상주 도우미를 쓰는 가정도 봤지만 보통 베트남에서는 현지인들이 외국인의 집이나 부유한 베트남 집에서 일하는 형태로 퇴근 후 돌아갈 본인의 집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주로 필리핀, 미얀마 등에서 취업비자를 받고 오는 케이스로 에이전트를 통해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고 오는 것이 기본이다. 집값 무서운 이 나라에서 제3국의(소득 수준이 현저히 낮은) 외국인이 본인의 집이 있을 리는 언감생심, 반드시 입주가 보장되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의무적으로 주 1회 휴무 보장(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권리, 일요일에는 오차드 일대에는 전국의 안티 모임이라도 하듯 곳곳에 삼삼오오 몰려있는 진풍경), 정기적으로 건강체크 및 보험적용, 일 년에 한 번은 고국행 비행기 티켓 제공, 주요 명절 시즌에는 보너스 지급 등 집주인이 지켜야 할 규정사항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고용한 안티에게 문제가 있을 시에는 언제든지 에어전트를 통해 바꿀 수도 있고 아주 심한 행동을 했을 경우는 바로 본국으로 추방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코로나 시국으로 제3 국에서 들어오는 안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재 그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 있는 실정이다. 한국음식 좀 하고 전 주인과 큰 문제가 없었던 '귀한 안티'를 구할 때는 주인이 그들을 인터뷰하는 게 아니고 안티가 본인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주인들을 골라 선택한다는 웃픈 실정.
하지만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하니 문제가 있어 다른 집에서 트랜스퍼당한 안티를 이제 막 입싱한 집주인이 멋 모르고 쓰는 악순환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도 한다. 또한 돈 욕심이 있는 안티들은 다른 집에 더 높은 가격으로 가기 위해 기존 집주인에게 쫓겨날 구실을 일부로 만들기도 한단다.
주변에서 안티들을 쓰는 지인들은 물론 맘 카페에 올라오는 '안티 한탄 사연'들을 들어보면 정말 지능적인 수법에 기가 차는 사건들만 해도 족히 수십 건은 넘는다.
그럼에도 손이 부족한 워킹맘들은 육아 때문이라도 자잘한 문제가 있어도 당장 자를 수도 없고 어떻게든 구슬려 데리고 있어야 할 계륵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쯤 되면 까다로운 상전을 모시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안티와의 사이가 좋은(그것보다는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이해하는) 주인들의 사연도 아주 가끔 듣기도 하지만 사연을 들어본 사람들의 열의 예닐곱 정도는 그냥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보다는 신체 스트레스를 안 주기 위해서 안티와 사는 것이 대부분이란다.
물론 외출 후 들어왔을 때 반짝반짝한 집과 잘 차려진 음식, 먹고 나면 알아서 치워주는 우렁각시 같은 존재, 부모님 찬스를 쓸 수 없는 육아노동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해방, 이렇게 상주하는 도우미가 한 달에 한화 100만 원 정도의 매력 넘치는 금액 등의 장점도 분명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남편이나, 내 배 아파 낳은 귀염둥이 아이들과도 하루에도 열댓 번은 부딪히고 짜증 내는 마당에 언어까지 제대로 안 통하는 생판 외국인과의 스트레스까지 굳이 추가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쓰긴 했지만 내가 만약 영유아가 있는 육아 독박의 신세였다면 분명 달라질 이야기. 우리 아이들이 이제 말이 통하며, 집안일도 시켜도 척척 해내는 나이가 돼서 어찌나 다행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