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계는 현장 업무가 많았다.
일주일의 절반은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강원도 까지 출장을 가야 했고, 남은 절반은 현장감시 결과를 보고하면서 다음 출장을 준비했다. 첫날부터 야근이 필수였다.
감시계에서 나는 제보받은 의약품이나 화장품의 과대광고나 품질 부적합, 무허가 제조, 수입 신고에 대해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유사한 사례나 규정을 확인해 위반 내역을 정리했다. 현장 점검에서 확인할 중점항목까지 정리하면 동료들과 논의해서 내 생각에 오류가 없음을 컨펌받았다.
현장 점검은 2인 1조로 이뤄졌는데, 증거를 확보한 상태에서 하기 때문에 대부분 특별한 트러블 없이 진행되었다. 한 번만 눈감아달라고 사정하는 업체도 있었지만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서 넘어가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정신없었지만 감시계에서 1년을 보내고 나니, 규정도 알만큼 알고 업무 절차도 익숙해져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순환 보직에 따라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은 다른 부서로 전출 가거나 부서 내 업무 이동을 했고, 신입이었던 내가 감시계에서 오래된 축에 속하게 되었다. 여러 사건을 처리했고 남이 하던 것도 곁눈질로 보고 경험하다 보니, 이제는 몸이 고된 감시계를 떠나 스스로 하산해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난 남들과는 달라.
당시 나는 서른 살이었다. 내 나이의 두 배쯤은 되실 법한 업체 대표나 임원들에게 규정이 어떻고 업무정지는 어떻게 되는지를 관(官)의 입장에서 얘기하다 보니 뭐라도 된 것 마냥 우쭐대기도 했다. 그리고 자만감의 덫에 빠지게 됐다.
현장점검이 계속되다 보니, 사전 준비도 소홀해지고 나에게 배정된 민원 건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많이 안다는 생각에 동료들과 논의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자료 조사나 규정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고, 이동하는 차에서 슬쩍 보고 점검에 나서기도 했다.
내 실력을 과신해 '누워서 떡먹기지'라 생각하고, 확인서* 날인을 주저하는 업체 담당자에게 핀잔을 주거나 날인을 강하게 요구하는 상황도 생겼다.
* 특정의 사실 또는 법률관계의 존재 여부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로, 공무원은 업체 책임자로부터 날인받은 확인서를 근거로 행정처분 등 조치를 함
또한 점검 과정에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현장이 달라 추가적인 정리가 필요한 경우도 발생했다. 동료들은 내 태도를 지적하면서 미리 자료조사나 규정 확인을 더 하라고 조언했지만 흘려들었다. 결국 문제가 터졌다.
간단한 광고 위반으로 생각하고 현장점검을 나갔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과대광고라고 생각했던 그 문구는 광고 가이드라인에서 금지하고 있는 문구와 비슷했지만 화장품 업계에서는 통용되던 문구였고, 이를 사용한 광고였기 때문에 위반이라 단정해 말하기 어려웠다. 업체는 과대광고라는 내 의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면서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우선 그 건은 처음부터 다시 살펴봐야 했다.
모두 사전 준비를 부족하게 했던 내 탓이었다.
광고 점검은 기본적으로 전반적인 맥락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에 본부에서 발간한 가이드라인과 그간의 적발 사례를 조사해 위반 문구를 특정한 후 처리하고 있었다. 또한, 내부에서 결론내기 애매한 건이라면 사전에 본부 질의부터 하고, 위반이라는 답변을 들은 후에 점검하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난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점검부터 나선 것이 문제였다. 내가 조금 안다는 사실만으로 동료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고, 내 고집대로 절차를 무시한 채 일을 진행하려 했던 것이다.
사태는 벌어졌고 해결을 해야 했지만 정작 난 그 걸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골치가 될 그 사태를 나서서 처리해 준 것은 계장님이셨다.
계장님은 업체 담당자를 다독이고 우리의 입장을 본부와 협의했다. 업체가 사용한 광고 문구는 화장품 업계 전반적으로 사용하는 측면이 있으나 소비자가 의학적 효과가 있다고 오해할 우려가 있을 수 있으니 사용하지 않도록 지도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본부에 의견을 제시해 광고 가이드라인에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앞으로 업계가 이 문구를 사용하지 않고 바꿔나갈 수 있게 유도하는 것으로 처리 방향을 정해 주셨다.
계장님은 신입이라 실수할 수 있다며 사전에 챙기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앞으로 나와 상의하면서 잘해 나가자고 말씀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난 질책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는데 리더로서 상황을 정리하고 다독여 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적당히 일이 익숙해지고 업무가 궤도에 오르게 되면 자만심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자만심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남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기 때문에 업무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주변과의 관계를 해치게 된다.
당시 나는 이제 업무를 시작한 햇병아리임에도 동료와 함께 한 경험을 혼자 다한 것 마냥 자신감이 과잉된 상태였다. 내가 아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고, 자세도 겸손하지 못했다. 만일 내가 그때에도 잘못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도 자만감에 업무 성장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에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잡고,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업무를 대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중에 내 업무를 인계받았던 후임자는 공무원 생활동안 이렇게 정리 잘된 인수인계는 처음이라며 내게 깔끔하게 정리해 넘겨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주었다.
직장생활이 빤해 지루해졌거나, 나를 품기에 비좁은 회사를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본모습을 냉정하게 살펴보자. 남이 바라보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를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능력이 회사라는 포장지에 싸여 평가받는 것인지 실제 내가 갖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변의 평가를 잘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이 완벽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