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배를 붙잡아야 한다!
서울청으로 처음 임용되고 두 해가 조금 지난 정기 인사 때, 나는 본부로 전보 발령이 났다.
새로 발령받은 부서는 식약처 의약품관리과였다. 의약품관리과는 약사(藥事) 감시를 총괄하는 부서로, 나는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의약품과 관련한 다양한 사건사고를 처리하고, 의약품 표시나 광고, 갱신과 같은 제도 운영도 담당했다.
업무 범위가 넓은 만큼 인원도 많아 통상 열 명 내외인 다른 부서보다 많은 20명이 넘게 근무하는 큰 과였다.
식약처 본부는 지방청과 달리 새로운 느낌이었다.
출장이 거의 없는 대신 야근의 연속이었다. 퇴근 시간이 넘어도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고, 과장, 사무관이 모두 퇴근한 뒤에야 주무관들은 정리하고 가는 분위기였다. 지방청 현장감시에서 의약품 품질 문제가 적발되면 전 직원이 대기하고, 관련 보고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함께 퇴근하곤 했다.
낮에는 상시 업무로 정신이 없었다. 주무관은 표시광고, 품질관리, 수입제도와 같이 과의 주요한 업무를 한 개씩 맡았는데, 업무와 관련해 제약사나 지자체 담당자, 민원인으로부터 전화가 쉴 새 없이 왔다. 출근하면 전화를 받으며 규제개선 과제나 국회 요구자료, 업무계획 같은 상시 업무를 하고, 일과시간 내 마무리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주요한 업무는 내 생각을 보고서로 정리해 사무관, 과장님과 상의해 처리해야 했고, 논의된 바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화장실 한번 갈 틈도 쉽게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매번 첫 번째 고개를 드는 시간은 점심시간, 두 번째 고개를 드는 시간은 저녁시간이었다.
사람도 쉽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검토했음에도 합을 맞춰 일해야 하는 사무관의 “버럭”하는 목소리에 기분이 요동쳤고, 아무 말 없이 날 쳐다만 봐도 오늘은 어떤 걸로 혼날지 신경이 곤두섰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싫었던 것은 당연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며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러던 중 사건 하나가 처리되고, 사무관님이 사건 처리에 고생했던 주무관들을 데리고 저녁을 사주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맘 같아선 오늘만큼은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나만 빠지긴 어려웠다.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장”과 같은 분위기가 나는 식당이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고 메뉴는 매운탕과 닭도리탕 두 개였다. 사무관은 꽤나 단골인 듯 주인에게 눈인사를 한 뒤, 메뉴 두 개를 각각 시키고는 소주를 따라주었다.
평상시 개인적인 얘기를 하지 않았던 사무관은 두 아이의 아빠라며 말을 시작했다. 나보다 12년 선배였다. 그리고 그날 같은 길을 가는 인생 선배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들었다. 공직자가 가져야 할 자세와 업무에 임하는 태도, 그리고 가정을 위해 해야 하는 일 같은 얘기들이었다.
사무관님이 해준 말씀 중에서 특히 기억나는 것을 꼽자면 약사법이란 공익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라는 것과 약사 면허를 가진 공직자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업무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바이오제약 분야를 미래 먹거리로 육성해야 한다는 정책 목표를 기저에 두고, 식약처로 하여금 바이오제약 분야의 낡은 규제를 없애 달라는 요구를 많이 하던 시기였다. 이에 규제개선이 필요한 과제를 발굴해 각 담당 별로 나누어 배정하고, 담당자는 제안 배경, 검토방향, 추진계획을 제출해야 했다.
나는 의약품 표시 담당이었는데 의약품 첨부문서(설명서)를 인터넷 홈페이지나 QR 코드로 확인할 수 있으니 첨부문서를 없애라는 규제개선 과제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첨부문서는 의약품 포장에 들어있는 종이 문서인데 제약사는 비용효과적이지 않으니 온라인으로 대체해 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사무관은 규제개선 과제를 검토할 때 규제의 필요성을 살피고, 대안이 실현 가능한지, 외국 규제당국의 규율 방식은 어떠한지, 현재와 대안의 비용효과성은 어떠한지, 그리고 약사 공무원으로서 전문성에 기반해 국민의 편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해 주셨다.
그러면서 이 과제는 매우 오래된 숙제인데, 첨부문서를 통해 안전한 사용관리를 하려는 목적이 분명한 상황에서 경제성만을 가지고 규제 완화를 하기 어려운 얘기라고 말씀해 주셨다. 의약품 첨부문서는 현재의 허가사항과 제품 사용에 필요한 내용을 “문서”로서 사용자에게 제공해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데,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만 확인이 가능한 방식은 장소와 시기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셨다. 또 세계적으로도 아직까진 의약품에는 반드시 첨부문서를 함께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참고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것은 현시점의 의견이고 사용 환경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검토될 수 있다는 얘기도 덧붙이셨다. 규제 완화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었던 나에게 공무원의 지식과 판단이 중요하다는 것과 규제를 대하는 태도를 알려준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후배인 나에게 이 길을 잘 선택했다면서 계속 공직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업무적으로 도와주겠다는 격려도 함께 해 주셨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일을 마무리하면 항상 저녁은 그 식당에서 한잔하고 들어가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회식 때마다 사무관은 공무원이 갖춰야 하는 자질과 자신이 가진 업무 지식을 아낌없이 나눠주셨다.
시간이 지나니 업무는 할만해졌다. 합이 맞는 동료가 생기고, 내가 갔던 길을 따라오는 후배도 생겼다. 일을 하면 할수록 사무관과의 관계도 끈끈해져 일하기 수월해졌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때를 회상하며 식약처에서 가장 재밌었던 시간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꼰대지만, 꼰대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후배 몇몇은 정신없는 하루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직이 맞지 않는다며 나갔다. 지금 이 순간 그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힘든 시절 만난 동료들이 앞으로 당신의 회사 생활에 자산이 되고, 일은 반드시 시간이 해결해 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처음엔 뭐든 어색하고 힘들다. 그리고 힘들 때는 주변의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먼저 다가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다가왔을 때 뿌리치지 않는 것도 용기다.
인간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담을 쌓는 것이고,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반대 성향의 사람과도 가까워져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까워지고 싶을 땐 술의 힘을 빌리자. 잠깐의 티타임도 좋다. 호감을 나타내며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후배를 싫어하는 선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