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바뀐 분위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2012년 3월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전 직장에서 승진 누락이 결정되자마자, 채용공고가 있었던 식약처에 지원했다. 그리고 덜컥 붙어버렸다.
급하게 부장님께 퇴사하겠다 말하고, 마침 새로 입사했던 신규직원에게 하던 업무를 인수인계하고 이직했다.
식약처 첫 발령 부서는 서울지방식약청 의료제품안전과였다. 아마 지역연고를 고려해 준 것 같았다.
지방식약청은 주로 제약사나 병원, 약국, 화장품 회사를 현장 점검하거나 서류를 검토하여 제품 판매를 허가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그중에서 내가 맡은 첫 임무는 한약재 회수 대장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중요하거나 고난도 업무는 아니었다. 엑셀만 켜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았다. 출근해서 비어있던 엑셀 시트를 채우고 회수량을 제출하지 않은 업체를 닦달해 서류를 받아내는 것이 다였다.
다들 바쁜데 나만 한가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좀이 쑤시고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이러려고 이직했다 싶었다. 경력을 쌓기에는 전에 회사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었다.
한 달 정도는 그냥 죽은 채 살았다. 신입 직원이 일찍 퇴근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동료가 야근을 하면 나도 같이 남아 저녁식사를 주문하고, 배달이 오면 신문지도 깔고 했다.
그러면서 주변 동료들을 찬찬히 관찰하고 파악했다.
처음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업무, 새로운 공간, 사람이 스트레스였지만 익숙해지니 긴장이 낮아졌다. 그리고 또래 맞선임과 사담을 나누면서 교류하게 되었다.
선임은 내가 하고 있는 업무가 지금 아니면 하지 못할 경험이라면서, 숫자만 입력하지 말고 생산량, 시중 유통량, 소비량, 회수량 등 용어의 의미와 의약품 회수 규정을 찾아서 공부해 보라고 조언했다. 부적합 판정된 시험 항목과 기준, 허가대장 검색 방법도 익혀 둔다면 나중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 얘기해 주었다.
그러면서 다들 처음엔 이 일부터 시작한다면서, 직원들은 업무를 대하는 태도나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고 넌지시 말해 주었다. 그날부터 일이 좀 더 무겁게 느껴졌고, 지금 일이 나중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바꾸니 재미도 생겼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말을 거는 동료들이 생겼다. 동료들은 지방청의 분위기, 그날 점검에서 있었던 일, 그간 경험한 현장의 긴박한 사례들을 얘기해 주었다. 특히 약사감시는 식약처 공무원만 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동료들과 함께 같은 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한약재 회수 대장 정리가 마무리됐을 즈음 나는 감시계로 가게 됐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기대나 설렘이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적응에 애를 먹게 된다.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가 버거워 넘어지기도 한다. 전에 회사는 어땠는데, 나는 이런 잡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심할 경우엔 우울, 불안, 불면 같은 심리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까? 힘들다고 적응을 포기해 버리면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초기에 어려웠던 경험은 모든 사람이 겪었던 것이다. 나라고 못할 리 없다고 마음을 먹어보자.
그리고 적응을 잘하려면 일단은 앞선 사람이 했던 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방식대로 하는 것은 적응이 끝난 뒤에 하자. 동료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조언을 받는 것은 빠른 적응에 도움이 된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이 기대했던 것과 다르고 적응하기 힘들어서 퇴사를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동기들 또한 기대와 실제 업무의 격차가 컸는지 많이 그만뒀다. 함께 들어왔던 17명의 같은 직렬 동기들은 이제 대여섯만 남았다.
아직 퇴사를 결정하기 전이라면 퇴사하려는 이유가 해소가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냉정하게 되짚어보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다. 공무원이 퇴사(의원면직)를 하는 이유는 사람이나 일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상사나 동료 때문이라면 공무원 조직에서 사람은 계속 순환보직되기 때문에 언젠가(생각보다 빨리) 해소가 된다는 점과 미워하는 사람을 두 번 이상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업무 때문이라면 어느 조직에서든 신규자는 밑바닥부터 일하는 것이 섭리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업무는 계속 바뀌기 때문에 언젠가는 당신이 원하는 그 일을 담당하게 돨 것이라고 얘기드리고 싶다.
적응이 힘든 상황이라면 지금은 성장하는 과정이고, 나중에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 무르익는 시기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적응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나아진다. 누구나 처음엔 어색하고 힘든 시절이 있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니 마음을 편히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