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쥐구멍에 숨고 싶을 때
슬기로운 편집 생활
편집자의 덕목은 무엇일까?
오탈자 없이 무사히 책을 내는 것? 책을 예쁘게 만드는 것? 책을 잘 팔리게 만드는 것?
물론 다 갖춰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편집자의 덕목은 늘 의심하는 것이다.
편집자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다.
'틈틈이'가 맞는지 '틈틈히'가 맞는지 알고 있어도 의심해야 한다.
이 책이 잘 나갈지, 이 글이 정말 좋은 글인지 의심해야 한다.
편집(編輯)자와 편집증(偏執症)의 한자 뜻이 엄연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의심에서 출발한다는 데서 결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탓일까.
여하튼!(고해성사에 앞서 사족이 길었다.)
최근 제본 직전 인쇄 사고가 터져서 진땀을 뺐다.
우리 회사는 스티커 책을 많이 내는데, 스티커 책 특성상 책 한 권에 4~500개 가량 스티커 조각이 들어간다.
스티커를 인쇄할 때 붙여지는 면 크기에 맡게 스티커를 떼어낼 수 있도록 정밀하게 스티커 모양을 따라 칼집을 내 줘야 하는데 그림 여분 안쪽에, 정확한 치수로 오차 없이 칼선이 들어가야 한다. 칼선을 따라 목형을 만드는데 여기서 말하는 목형은 스티커 모양대로 생긴 칼을 만드는 틀이다.
여기서 뜬금 제작 정보
- 목형은 칼선의 수가 많고 모양의 난도가 높을수록 비용이 올라간다.
- 목형은 대체로 도무송 작업장에서 보관해 주지만 너무 오래 되어 녹이 슬 경우 칼을 교체하거나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림에 칼선(별색으로 넣는다)을 넣는 것은 디자이너의 일이고, 편집자는 칼선을 표시하는 별색(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는데 보통 그림이랑 겹치지 않도록 눈에 띄는 빨간색을 쓴다)이 들어간 스티커지까지 2교쯤 교정 볼 때와 최종 파일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고가 났느냐! 글쎄 480여 개 스티커 조각 중 한 개 조각에 칼선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걸 3명이 다 놓치고 그대로 인쇄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스티커 한 개 목형이 만들어지지 않아 스티커에 칼선이 들어가지 않게 됐으며, 말인즉 그 스티커 조각은 독자가 직접 자르지 않는 이상 떼어낼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독자들한테 그까이꺼 한 조각만 그런 건데 선 따라서(그림작가가 얹혀준 선만 있고 칼선이 안 들어간 상태) 대충 칼질해서 쓰세요, 라고 할 수 있나? 더구나 이 스티커 책 독자는 어린이인데 말이다. 이건 엄연한 불량이다.
여기서 반전은, 사실 난 칼선이 들어가지 않은 스티커 조각을 최종 파일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칼선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 못하고, 유독 그 한 조각만 라인 색이 달랐는데 그냥 별 의심없이 넘겨 버려 이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나는 편집자니까 오탈자와 페이지, 각 정보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중점으로 보고 최종 파일에서는 그림이 깨지거나 빠진 건 없는지까지 검토하는데 스티커 책은 이 회사에서 처음인지라 스티커 조각에 얹혀진 선 색깔이 하나만 다르다는 게 이런 결과를 초래하리라곤 생각 못했다.
그 순간 의심병이 발현되지 않고, 디자이너가 알아서 했겠지... 라는 안일한 상태로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480 몇 개 칼선 색이 다 빨간색인데, 1개 스티커 색만 다르다면 당연히 의심하고, 디자이너한테 왜 다르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제작 사고가 난 걸 알게 된 것은 제작이사님 전화로부터였다.
그런데 다행히 그 부분만 목형을 따서 스티커를 떼어지게 만들 수 있다고 하셨다. (살았다!) 다만 별색이 아닌 일반 색이 얹혀져 있어서 그 선이 칼선 들어가는 라인을 따라 줄이 그어질 수도 있으니, 그 부분을 다시 출력할 것인지 물으셨다.
내 판단에는 어차피 선 자체가 두껍지 않고 목형으로 눌리게 되면 별로 티 날 것 같지 않아 그냥 작업 진행해도 되지 싶었지만 결정권은 제작자인 대표님한테 있기에 상황을 보고했고, 결국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문제가 크지 않아 다행히라 넘기긴 했지만, 쥐구멍에 심고 싶은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디자인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외주 디자인 실장님, 내부에서 최종 파일을 검토하는 디자인 차장님과 나 셋이 모두 실수를 잡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걸 이 바닥에서는 눈이 삐었다고 하는데, 신기하게 눈이 삘 때는 한 사람만 삐는 게 아니라 다른 작업자 모두 눈이 삐게 된다. 누군가 명민하게 알아채고 나면, 정말 계속 그것만 보일 정도로 너무 명확하고 분명한 실수인데도, 편집신의 장난으로 작업자가 동시에 장님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편집신은 짓궂기도 하지^^)
아무튼 이렇게 하나 또 배운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배우는 거지만, 대표 입장에서는 내가 꼼꼼하지 못하다고 생각할까 봐
자꾸만 주눅이 들었다. 편집 N년 차라고 큰소리 땅땅 쳐놓고, 아무리 스티커 책이 여기서 처음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런 기본적인 실수를 할 수가 있을까. 정말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요즘 살이 너무 쪄서 쥐구멍에는 숨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음에는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