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그 모호함

자꾸만 끝을 흐리는 그것

by 얄리

십 년 전 이맘때인가 보다. 나는 40대가 되기 몇 해 전 '다가올 마흔에 대한 기대'를 블로그에 비밀글로 남겨 놓았다. 그때 내가 상상하던, 바라던 40 대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흔이라는 시점을 넘어선 후의 삶에서 지금과 가장 확연하게 달라질 부분은 '세속적인 가치들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전보다 더 커진 세상을 바라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넓어진 포용력으로 나의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감은 물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기대한다. <2010년 11월의 내가>


십 년 전 어느 날처럼 몇 해후로 다가올 50대에 대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싶어 하는 이때를 맞이하여 과거의 희망사항을 다시 보니 웃음이 나왔다. "40대에 득도를 하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셈이냐?" 싶었다. 그러기에는 나라는 개인이 십 년 전 상상했던 40대와 몸소 겪은 40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주요 원인에는 ‘세상의 변화’라는 예측 불가의 변수들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십 년 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가장 컸다. 단언하듯 말하자면 내가 겪은 40 대란, 득도를 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이었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보다는 나의 내적 평화를 찾기에도 급급한 시기였다.


40대는 흔히들 중년에 접어드는 시기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년이라는 '삶의 특정 시기 상의 범위'는 생각보다 매우 포괄적이다. 딴에는 이미 들어서 있다고 확신하며 "우리도 이제 중년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정확한 범위를 찾아보니 한마디로 '정의가 모호한 연령대'였다.


인간의 인생에서 장년과 노년 사이의 단계를 이르는 말. 중년은 일반적으로 40세 이상~65세 미만이다. 일 발달심리학에서 중년기는 40~50대를 이른다. 다만 의학의 발전과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실시로 평균 수명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서 9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중년으로 인식되던 30대가 현재는 장년으로 불리고, 중년이라는 표현을 쓰는 나이 때는 40~50대로 밀려났다. 그러므로 90년대에 30대를 맞는 현재의 50대는 20년째 중년. 만년 과장 현재도 계속 수명은 늘어서 40대 초반에 20~30대의 미모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나옴에 따라 10년 내외로 40대는 장년, 중년은 50~60대로 밀려날 수 있다. 실제로 2017년 대한민국 중위 연령은 42세로 나왔고, 2027년 48세로 예측되며 2056년에 이르면 중위연령이 환갑이 된다. 2015년에 UN에서는 중년의 나이를 66세부터 79세까지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나무 위키-중년> 중에서 - 2020.07.02


이게 다 인간의 수명연장과 달라진 시대상에 따른 연령대 별 특징 변화 때문이다. '내가 파악하는 세상의 흐름보다 시대상이 한 걸음 먼저 움직이더라'는 것을 느끼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빨리 예측하기 위해 딱히 뭘 더 하지도 않았던 자체적 게으름의 결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 변명은 넣어두겠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이젠 중년인가 싶은 시점에서 꽤나 오랫동안 노년에 진입하지 못하고 도돌이표처럼 중년을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은퇴'라는 말이 유효한 때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 먼 후세에는 이 단어가 고어(古語)가 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 연령상의 시점을 잡는다는 것은 애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으로서 내가 중년인 것은 맞다. 비교적 초반에 속하는 편이라 나와 주변의 변화에 더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도 맞고. 다만 나의 관점에서의 중년이란 개념은 삶에서의 중간 시점이자 터닝포인트 지점이다. 이원적인 전제하에 비교를 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겠지만 그것만큼 이해하기 편한 기준도 없다. 사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이전이라고 부르는 때와 현재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경력상담' 시간에 생애 및 경력 단계를 배울 때, '40대가 꼴랑 정오 정도의 시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무된 나머지 쾌제를 부르며 한동안 핸드폰 잠금화면에 시계 이미지를 박아놓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렇게 나의 고정관념만 통제한다면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꿈도 야무진 희망사항이었다.


희망사항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중년에 관련된 책들을 여러 권 사들여 펼쳐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관통하는 무엇'을 느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다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세분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연령 범위에 근거한 그룹핑과 대안 모색이 합당하기나 한 걸까? 그저 현재의 내 삶 속에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구획이 정해진 트랙에서 돌고 있는 자가 아니다. 유사한 구간이라 해도 숨이 차거나 희열을 느끼는 시점은 저마다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느끼느냐다.


정오에는 태양이 나의 머리 바로 위에서 뜨기 때문에 그림자의 방향을 감안해서 태양의 위치와 그에 준한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딱 이때다" 싶었다. 내 삶의 방향을 나라는 인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온전히 내가 정의할 수 있는 시점이 말이다. 힌트 없이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는 시점, 그런 의미에서 꽤나 중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현재의 정리가 오답이어도 상관없다. 오답풀이는 미래의 소일거리로 넘기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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