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관여하고 지지할까 보다 중요한 믿음의 문제
삶에서 무엇보다 관심이 많고 신경이 쓰이면서도 생각만큼 의지대로 밀고 나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자식에 관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항상 고민하는 문제는 자식이 성인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할 때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 무리 없이 안착해 원하는 것을 해 나가는 삶을 살려면 부모의 의도적인 관여와 자율적 개방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것이 적절한가였다. 사회적인 관계가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주변 상황을 살펴보지만 과거에 비해 더욱더 정교해진 경쟁체제 속에 나날이 개인화되어 부모의 밀착마크가 없이 자녀의 자발적 자유에 맡긴다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특정분야에 두각을 보인다면 고민 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고 뭔가 집요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재능과 관계없이 해보라며 응원하겠지만 어느 것도 아니라면, 일단 방향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무난하게 사회에 진입할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남들 하는 것처럼 공부를 하는 것, 나와 아들도 그것 말고 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하라는 게 아니라 너무 뒤처져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는 거였다. 아들은 군소리 없이 학교를 오가고 영어와 수학학원을 전전하다 귀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을 꾸준히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하위권의 성적표를 받아보고는 화가 났다. 기본 학원비에 특강비까지 받으며 각별히 챙기겠다던 선생들은 대체 뭘 한 건가 싶어 항의하자 “못 하겠다면서 우는 일이 많아요”라며 의지가 박약한 아들의 성향 때문에 진도를 나가기 어려웠다는 하소연을 했다. 그래서 의지가 생길 때까지 의자에 앉혀두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말인가? 하기 싫고 성과도 안 나는 일에 얽매인 아들은 고역이었을 것이다. 매 순간이 좌절이고 자신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열등의식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하긴 그건 의지가 박약한 아들이나 그런 아들을 둔 부모인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겠지. 전문가니까 내가 부여하지 못하는 학업 동기를 이끌어내는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오판에 기대를 건 채 아이의 무던함을 적응의 싸인이라 믿으며 방치한 내 잘못이다.
“어차피 학원을 다녀도 성적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을 배우는 게 어때? 단, 하는 동안 흥미를 잃는다면 무덤덤하게 붙잡고 있지 말고 얘기해 주는 조건으로” 학교 수업은 부모가 관여할 수 없으니 그 외의 시간을 바꿔보자 싶었다. 밀리터리 덕후에 게임을 좋아하는 아들은 군사전략 게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게임은 기획하는 사람, 디자인하는 사람, 프로그래밍하는 사람 등 여러 분야 사람들의 합작품이다. 직접 경험한 적이 없으니 적성에 맞는 분야가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임 프로그래머?"아들이 떠올린 직군은 이것이었다. 과연 그쪽이 맞을는지 확인해 보자. 관련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 게임 프로그래밍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과정을 밟으며 아들은 그쪽은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시각적인 것을 만드는 쪽을 선호하던 아들은 3D 디자인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들은 주중의 모든 저녁 시간에 학원에 갔다. 결과물이 한 두 개씩 늘어갔다.
과정을 밟는 중간에 특성화 고등학교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게임과 소프트웨어 분야에 특화된 수업을 진행하는데 그중 게임 그래픽학과가 있고 진학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통상적으로는 졸업 후 취업이 우선적인 목표라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길이었다. 아들은 좋은 기회를 발견했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성적이 좋지 않고 공부에 흥미도 없는 아들이지만 대학을 완전히 배제하고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루트를 그려간다는 것을 흔쾌히 추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들에게 고교 진학의 여러 방향과 각각의 루트 그리고 그에 따른 기회 및 한계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두말없이 특성화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선택했다. 포트폴리오로 만들 주제를 선정하고 참고 자료들을 모아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진학하려는 학교의 설명회에 함께 참여하면서도 이 선택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어쩌면 자식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건 어떻게 돕고 지지하느냐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고정관념과 주변의 의견에 얼마나 휘둘리지 않느냐?'인 것 같다. 재능이나 선호를 존중하며 관련된 목표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고 아들의 선택을 세상의 일반적인 방식보다 우선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남들이 흔히 예측하는 한계에 봉착하게 만드는 일이 될까 봐 불안했다. '차라리 내 삶이라면 그게 뭐든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싶을 때 문득 '내가 나 자신만큼 아들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학을 해야 하는 당사자가 나라면 선택한 것을 밀고 나갔을 것이고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면 그것을 뛰어넘을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아들이라면 다를까? 모든 한계를 부모가 치워줄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부모라는 입장에 서 있는 나는 자식이라는 입장에 서 있는 아들보다 그다지 어른스럽지도 않은 것 같았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는 것에서 자립도가 떨어지는 건 자식이 아니라 부모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