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줄어든 관계의 이면
해마다 성대하게 생일파티를 하던 동료는 올해 생일을 조용히 넘길 모양이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정해진 축하인사를 하고 돌아가며 현재 시점의 자신을 보고하는 일이 귀찮아진 까닭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모이는 자리, 그 시간의 공백만큼이나 서로에게서 멀어져 있다가 만날 때면 일 년 전의 기억과 달라진 현재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대충 흘려듣고 대충 이야기를 한다. '얼굴 보는 게 좋은 거지. 뭐'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음을 알아간다.
"점점 사람 만나는 게 줄어드는 것 같아요. 자주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고 새로운 사람이나 자주 만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아 지는 것 같아요" 그는 말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에 비하면 관계의 폭이 몇 분의 일밖에 되지 않지만 전보다 더 낯을 가리고 있다. 관심사에 따라 만났던 관계들은 늘 패턴이 같았다. 관심사를 걷어내면 낯섦의 거리감이 드러나는. 특별한 관심사가 없더라도 항상 편하게 서로의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위안을 받는 것은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가족, 동료 그리고 친구였다. 오랜 시간 서로를 보아왔던 사람들. 굳이 관계의 폭을 이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지만 편하지 않은 사람들 속에 애써 나를 밀어 넣으며 친목을 도모할 의지를 다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줄어든 관계의 이면,
소수의 사람들 간의 관계는 깊이가 더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것은 서로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을 얘기하기 위해 과거를 읊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서로가 잊어버린 자신을 상대의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리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유사한 삶의 패턴과 대면하게 만드는 것도 이들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해가는 서로를 격려해주고 바라봐주는 온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스함이 깃들게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내 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여운이 남는다.
줄어든 관계만큼의 공백, 그 안에 '나'라는 사람을 불러들인다. 타인과도 관계하지만 우리는 자신과도 관계를 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에 의해 생기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바라보게 된다. 때때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처럼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을 남기기도 한다. 적어둔다. 잊고 지낸 듯하다 문득 그 문장과 마주치면 내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토록 오래 함께 해온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나라는 사람과의 대화가 물고를 트기 시작했다. 못 다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진다.
외로움은 그리움을 동반한다. 자신과의 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정. 외로움은 관계 욕구의 발현이다 외롭지 않은데 굳이 관계를 가지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욕구가 자연스럽게 올라오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필요하다. 때가 되면 알아서 밖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외로울 틈이 없을 만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 있다 보면 내가 정말 그리워하는 대상이 누군지 알 길이 없다. 혼자만이 시간이 충분히 차오르면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타인과의 대화가 아닌 바라보기로써의 이해, 조용한 관찰이 늘어난다. 말이 주가 되던 때에는 말하지 않는 것을 무심코 흘려보냈다. 말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말이 아닌 것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주변을 말없이 관찰하면서부터였다. 대화가 많지 않다는 것이 무관심 그 자체는 아니다. 부단한 관찰에 의해 쌓인 이해를 잠시 짧게 스치는 대화 속에 담아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적절한 거리에 서 있어주는 것이 배려가 될 때가 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 역시 대화다.
낯선 사람들과 낯설지 않은 대화를 기대한다. 언젠가 나는 오래되었다는 시간적인 유대감을 벗어나 아무런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한때 아주 깊은 대화를 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우연히 다가온 사람에게 아주 오래 알아온 것처럼 서로를 내비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그런 일. 그때 즈음이면 내게 있어서 관계란 지금의 생각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의 여백을 남길 줄 알게 되는 어느 날을 기대하며.
관계란 개인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과 타인과의 만 남으로 인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람의 차이가 있고, 30개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 중 한 두개가 사라 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3~4개의 모임에 참여하면서 하나의 모임이 늘어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도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달라진다. 나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에너지를 소모하는 타입이었고, 하나 의 모임이 늘어나는 것에 부담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남을 가지기 전에 자신만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했다. 내가 타인과의 대화에서 원하는 것은 네트워크가 아니라 삶에 대한 공감과 성장이었 다. 막연하게 관계의 지평을 넓혀보자는 것은 도움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타인들에 게 유효하다고 해서 나에게도 유효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관계 안에서 타인은 뭘까? 내게 있어서 타인은 '내가 삶 안에 있음을 재확인시켜 주는 존재'다. 이를 테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아의 경우 포대기로 몸을 꽁꽁 싸메어 준다. 엄마의 뱃 속에 있 을 때 자신을 잡아주던 막이 사라진 아이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포대기로 엄마의 뱃 속과 같은 압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으면 아이는 자신과 세상의 경계를 체감할 수 없어 경기를 일으킨다. 그처럼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신생아의 포대기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나와 가까 운 타인이다. 그런 타인은 내가 지나치게 하나의 이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싶을 때 한 텀 쉬어가는 쉼 표가 되어 주거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사방으로 시선이 분산되어 혼란스러워 할 때 초점을 다 시 조정해 주곤 한다. 적어도 내게 적합한 타인과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