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이자 이견자

권태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

by 얄리

집으로 향하는 건널목 앞에서 파란 신호가 켜지기를 기다리다 문득 내 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이 나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홀로그램인 듯 느껴졌다. 저마다의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 그 안에 나란 방금 내 앞으로 스치고 지나간 많은 사람들처럼 각자에게 배정된 룰에 따라 기계적으로 흘러간다. 어제의 나는 이곳에 이 시간 즈음 서 있었고 오늘의 나도 그러하며 내일의 나도 다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한동안은 그럴 것이다. 언젠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풍경과 이 시간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까? 아니면 아주 무기력하고 권태로웠던 어떤 날의 기억으로 남을까?


아마도 이 모든 갑갑하고 지루한 일상의 틀에 나를 가두게 된 것은 그를 내 삶 안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쉬워 집 근처 공원을 뱅뱅 돌던 때가 있었던 기억에 의하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했던 것 같다. "갈 때 빵 사 가" 메신저에 문자가 찍힌다. "집에 들어가기 싫..." 글자를 쓰다가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카톡이 아니어서 읽씹을 들킬 일이 없는 건 다행이다. 한참 만에 한숨을 토해낸다. "웅. 그래" 나는 또 생활에 졌다. 사랑? 그런 것을 했었나 싶다.


아들이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돌아온 남편은 습관처럼 전날 본 드라마스페셜의 다음회를 재생한다. 아무 말 없이 드라마를 보다 슬슬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 직원들의 업무 외 시간에 대한 배려가 일절 없는 탐욕스러운 사장의 횡포가 지긋지긋하다면서도 결국 월급 받고 있는 게 어디냐로 끝맺음할 것이 뻔한 이야기를 몇 년째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둬" 진심이었다.


말이 씨가 된다면 씨앗에 싹을 틔우는 것은 당사자의 마음에 달렸다. 얼마 뒤 이전에 다니던 회사의 상관에게 뻔한 의도의 안부를 묻고 이직의 가능성을 염탐하던 끝에 남편은 회사를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직서를 내고 옮겨 갈 회사의 입사일 통보를 기다리는 동안 집에 홀로 남게 된 그와 매일 점심시간을 함께 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사들고는 강변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노년의 부부가 손을 잡고 산책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 거야?" 마치 예행연습을 하는 것처럼. 일상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고 우리의 과거 이야기마저 쓰임을 다하자 현재를 살아가는 서로의 심정에 대한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 우리는 이것을 말해야 했다. 어떻게 그 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안주할 틈이 없어. 더 힘이 빠지기 전에 부지런히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야만 해" 우리의 갈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해서 지금 안주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노년을 만나고 말 것이다. 지금의 백만원과 노년의 백만원은 다르니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쌓아두는 게 답답한 현실에서 탈출할 길이다. 남편을 사로잡고 있는 답답함의 근원과 대안은 이랬다. 늘어가는 노년층과 미래 대책에 대안이 없어 보이는 이 사회를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위기의식의 발현이었다.


"우린 잘 달려왔어. 우리가 이룬 것들을 봐봐. 또 이뤄가게 될 거야. 틈틈이 쉬며 축배라도 하면 안 되나?" 지난날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었으나 지금은 묵묵히 달려 제법 삶의 안정권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해왔다는 매듭도 없이 줄기차게 달려야만 한다는 것은 여태까지 달려온 많은 시간들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허무하다. 더 오래 멀리 뛰려면 어느 시점에서는 서로를 위한 휴식과 격려가 필요하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답답함의 근원과 대안은 이랬다. 길어지는 수명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삶에서 유연한 텐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발현이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달리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려고 한다. 두 사람에게 '달린다'라는 것은 동일한 행위 그러나 다른 방식의 전개였다. 전자는 함께 달려야 할 사람이 자꾸 한 눈을 팔거나 주저앉아 쉬려고 하니 조바심이 난다. 후자는 숨도 고르고 바람도 느끼고 싶은데 함께 할 사람이 또 앞질러 가버리는 따라 뛰기가 버거워진다. "지금 쉬는 것을 보류하고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노년에 이렇게 손잡고 산책을 할 여유라는 것이 생길 수 있을까?" 남편은 묻는다. "서로 손잡고 산책해 보지 않은 부부가 돈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손이 잡아지고 함께 걸어가게 될까?" 나 역시도 묻는다.




질문에 대한 답이 꼭 말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답답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난 후 나는 남편의 한결같은 돈 관리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나의 여유에 대한 소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향상 삶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고 계획한 바에 따라 차근차근 현실화되는 느낌이 들어야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였다. 남편은 외식을 선택하는 주말과 아내의 저녁시간 할애를 늘렸다. 잠깐의 쉼이 더 이상 따라가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내 성향상 장거리를 지속적으로 가는 것보다 분절해서 순간순간 빠른 속도를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키기는 어렵다. 아마도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찰떡같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같은 것 또는 다른 것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사람들, 절대 한 번에 많은 것이 찾아지지도 않고 찾았다고 해서 영원히 잃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그렇게 '이게 나고 이게 너구나'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그런 사람들. 그게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서로 다름'이 혼자일 때 보다 더 깊은 외로움을 안겨 줄 때도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데 서 있는 사람조차 나를 모르나 싶은 마음에. 하지만 그럴 때를 제외한 거의 나머지, 인지조차도 못할 새털 같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은 덜어준다. 공기 같아서 못 느낄 뿐.


어쩌다 보니 치르게 된 예행연습의 그날 이후 굳이 '맞추자'는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연차가 일치하는 날 그때처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산책을 했다. 아들이 점점 자라 부모가 항상 함께하는 것의 유효성이 희미해져 갈 무렵 부부는 아들의 방을 두드린다. "데이트하고 올게" 아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진다. "웅. 그래. 잘 놀다 와" 아들은 계획이 있고 부부도 계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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