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단경로> 중에서
나는 데이터 밖의 세계에 관해 언제까지나 무지하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남기고 시체는 썩는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모든 죽음은 행방불명이다. 영구 미제가 되어버린 실종 사건이다. 유실된 데이터이다. 무엇이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그 앎에 갇히고 만다. 그렇게 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상실했다. 이를 증명할 데이터가 내게는 애초에 없었다.
<최단경로> 중에서
소설의 첫 도입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행위, 그것은 ‘찾는 행위’이다. 혜서는 대신 맡게 된 프로그램의 PD자리에서 전담당자 진혁이 남긴 알 수 없는 숨은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의 기이한 행적을 찾아 나선다. 애영은 납득할 수 없는 가족(자신의 딸과 엄마)의 죽음에 얽힌 진정한 원인을 찾아 헤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찾는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 그것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 이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납득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이끌려 '찾아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이 일상을 살 수 없을 만큼의 짐을 마음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억울함일 수도 있고 죄책감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원망일 수도 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라고 하는 건 그 자체로 명확하다. 그 사람의 삶이 현재 not good이라는 거!
그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해서 믿을 만 하지도 그렇지 않지도 않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샌디섬, 그것은 수많은 시간동안 지도에 있었다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기를 반복해왔다. 소설은 말한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도 문제라고 말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그게 의도하지 않게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다. 되풀이 되는 것 그 자체로 데이터는 모두 '불신'이 전제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혜서, 애영, 진혁 등 큰 줄기를 이루는 흐름 상의 주인공의 삶에서 그런 불신의 조짐은 없었다. 즉, 마음의 변화나 태도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어떤 우연에 의해 혜서와 애영이 서로 마주하게 되기 전까지는...다만 그들의 종적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그들의 동선이 있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군가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사실, 그 누군가의 시선 때문에 규정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 미결의 무언가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침대를 구매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구매한 상품이 삼겹살이라는 빅데이터가 도출되었을 때와 같이 알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 지표화 되면서 유의미해지는 기이한 현상을 자아낸다. 이 기이함이 이 소설의 중요한 축이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최단경로라는 건 아니다. 최단경로는 여러경로들 중 가장 짧은 거리를 이를 뿐. 무지의 상태에서는 점에서 점으로 가는 가장 정답의 길이지만, 알고 나서 보면 가장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길. 반면, 소설 속 애영은 다미안이 내 준 과제를 통해 출제자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가장 매력적인 경로를 찾아냈다. 이른 바 최적경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경로마저도 평안하고 만족스러운 길. 하지만 이런 최적의 경로는 한번에 찾아지기 어렵다. 컴퓨터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경로를 제시하는 기능을 하도록 만들려면 점과 점 사이의 경로 안에 피해야 할 것과 활용해야 할 것 등의 기본적인 조건들이 사전에 주어져야만 한다.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거나 벽을 뚫으려고 할 테니까. 이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단, 학습을 위한 너무 많은 조건을 주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너무 많은 조건은 결국 뒤엉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갈 상황을 만들어내고 만다고 말한다. 엉키면 원점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구나! 이게 당연한데 신선하게 느껴지는 게 흥미로웠다.
혜서와 애영, 진혁이라는 사람과 연관된 두 사람 간에 연결점은 사실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머나먼 타국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되고 마치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공동의 임무라도 부여받은 것처럼 진혁의 종적을 추적한다. 현실적으로 그다지 좋지 못한 상태에서 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어떤 존재를 찾아가는 최적의 경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하기로 한 두사람. 이들이 왜 이런 연대를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어떤 감정적인 유사성에 대한 공감이 발생했으리라는 추측만을 남긴채 소설은 끝이 난다. 진혁의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시작이 끝인듯 말이다. 이 두사람의 유사성이라...내가 느끼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 바로 질러서 가는 것이 아니라 뺑 둘러서 굳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혜서도 애영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진혁에게 묻는 것 말이다. 숨은 메시지를 남긴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물을 수 있었을 것이고, 왜 함께 떠나기를 주저했는지 혹은 주저한 게 맞는지를 물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묻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들키기 싫은 사람들인 듯. 두려웠을까? 진실을 알기가, 아니면 진실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소설의 제목과 달리 두사람의 행보는 최단경로가 아닌 최장경로처럼 보인다. 굳이 돌아간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간다. 이율배반적인 경로, 벽을 뚫고 강을 걸어서 건너는 것과는 또 다른...없는 벽을 짓고 없는 강을 만들어 돌아가는 그런 경로...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그리고는 종국에 이르러 실행한다. 원점으로 되돌아 가는 고투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