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에서
십오 대가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사람들의 지극한 불행과 지극한 행복에 대한 책을 쓰겠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세차게 퍼붓는 비와 건물 폭파 기사들을 나는 사랑한다. 거대한 타이어에 바람을 넣듯 폭파 기사들이 집과 거리를 송두리째 날려 보내는 광경을 나는 몇 시간이고 서서 지켜본다. 벽돌과 돌과 지주가 몽땅 들리는 그 첫 순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중략)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너무 시꾸러운 고독> 중에서
삼십오 년 동안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해왔다.
주인공 한탸는 말하고 또 말한다. 그래왔다고 말이다. 그 일은 상냥한 도살과 같아 마음 한켠으로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일을 통해서 그는 그만의 행복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삼십오 년이었던 거다. 더럽고 냄새나고 위험하기까지 했던 그의 공간이 뭐가 문제였겠는가. 그는 오직 그만의 정신세계를 시끄럽게 달구어 놓는 책과 함께할 수만 있으면 족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더이상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아 차린다. 그렇다고 새로운 세계에 맞춰 살아갈 자신도 가져지지 않는다. 삼십오 년 동안 해온 폐지 압축의 일과 이별할 수 없었던 그는 그의 삶을 압축해 버린다. 이 모든 과정을 한탸와 함께 했다. 그의 마지막 선택에 눈물을 흘려야 할지 박수를 쳐주어야 할 지 알아 차리기도 전에 책을 손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이럴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주변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시간도 장소도 사람도 구구절절하게 얘기하는 법이 없는 한탸였다. 그에게 있어서 온전한 고독이 얼마나 큰 삶의 원천이었는지는 그래서 더 와닿을 수 밖에 없다. 그가 주변을 보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고독안에서 주변이 보이지 않았던 것 뿐이었을 것이다. 삽십오 년 동안 그를 지탱해온 고독이 아니었는가...한탸가 어찌 배웅하는 자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