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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Oct 28. 2020

자아, 궁극적 의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 자아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끝이다. 자아는 모든 존재의 탄생이고 시작이며, 끝이자 죽음이다. 자아는 영원하니 결코 태어난 적이 없고 결코 죽은 적이 없다. 자아는 모든 곳과 모든 사물 속에 존재하고 자기 속에 모든 만물이 존재한다. 자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없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 - 크리슈나가 전하는 신의 본성 자아의 신성이란... 



  가장 낯선 것에서 가장 익숙한 것을 만나다. 베다보다는 익숙하게 들었던 도교, 불교, 철학, 기독교의 이야기보다 더 낯익게 다가온 것은 위의 문장과 유사하다. "나의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나의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긍극적으로 하나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아다. 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의식, 관념일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가 따르는 거대 규모의 종교나 사상 체계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이라는 것일 뿐,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얻게 될 결론에 가장 가까운 말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수많은 인도인이 인생의 여정 중 특정한 때에 시간을 비우고 온전히 내면을 탐구하는 기간을 계획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이겠지만, 하루 하루를 일상적인 것에 얽메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쉽게 계획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바가바드 기타>의 말은 뼈를 때리는 충고인 것 같다. "세상이 너에게 쥐여준 의무를 행하라. 그리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럴 때 행위는 업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너를 신에게 향하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라는 것 말이다. 내면을 탐구하는 기간이 따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진솔함을 다하되 그랬다는 이유로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곧 탐구의 일환이지 않을까. 어차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자아로서 쫓길 대상도 더 가지거나 잃을 것도 없으니...그저 나아갈 뿐...




도'를 '도'라고 할 수는 있지만, 항상 그러한 '도'는 아니다. 무엇의 이름을 지을 수는 있지만, 항상 그러한 이름은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원을 이름 지은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욕'하면 (천지의 시원이라는) 그 미묘함을 볼 수 있고, 항상 '유욕'하면 (만물이) 순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이름이 다를 뿐 둘 다 신비한 것이다. 신비 중의 신비이고 모든 신비의 문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 - 노자-도경 1장


도경에서 '도'에 관한 이야기와 그 안의 '무' 그리고 '유'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읽었던 <우주>와 <인류>에 대한 것을 상기시킨다. 창조의 순간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던 무한한 우주, 그 안에서 '자신의 정보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라는 정보까지 다음세대에 전달하는 놀라운 존재의 발현. 그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무욕'하면,  어떤 욕심도, 욕망도, 원하는 것도 없다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 이전인 '없음'의 미묘함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해석이 와 닿는다. 볼 수도 경험할 수도 없지만 느껴지는 경이로움, 그게 '없음'의 미묘함일까. 한편 '유욕'하면, 욕심, 욕망, 원함이 있다면 우리는 눈앞에 존재하는 만물의 생성하고 소멸하는 '있음'의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해석 역시 와닿기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우리의 소임은 '전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인데 말이다. 생성하고 있을 뿐이고 소멸하고 있을 뿐인 과정안에 소명을 다할 뿐인데...




덕이란 인위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로서의 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가 그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덕 역시 무위(無爲)의 자연스러움을 따를 때 발현될 수 있다. 덕이 없는 사회에서는 인이 강조되고, 인이 없는 사회에서는 의가 강조되며, 의마저도 없는 사회에서는 예만 강조된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 - 노자-덕경


덕경에서 '덕'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것이라 조금은 더 현실적인 관점으로 와 닿는 면이 있다. 그 주장이 현실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의미에서 현실적인 관점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 인간의 욕구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을 것에 의하면 덕이란 뭘 해서 생기는 것 자체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어도 무방한 것, 두손 두발 다 들고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르는대로 봐도 평온한 상태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이 아니게 될 때, 인간 그리고 세상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대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쉽게 보면 처음에는 인간 본연의 어짐에 호소하고, 다음에는 정의로움에 호소하고, 그것도 안되면 규칙을 세운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그래?"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을 때 "법으로 합시다"가 오는 것처럼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거스르고 있기에 세세한 것까지 모두 규정을 두어야만 하는 걸까?"하는...'예가 강조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충성과 신의가 사라진 혼란의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식일 뿐이다'라는 말이 아주 섬뜩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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