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부정의 균형이 낳은 낙관적 편견
인간으로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죽게 될 운명임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과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을 충분히 균형 잡힌 상태로 유지하는 덕분에, 다른 영장류와 지적인 사회적 종을 넘어서는 진화적 이점을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이른바 '현실을 넘어선 정신적 변이'다. 죽음을 자각하는 행위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서 우리를 좀먹는 벌레와도 같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부인하는 행위와 결합되면 낙관주의적 편견을 선사한다. 이 낙관적 편견은 인간의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하며 불안이라는 매듭을 끊어줄 수 있다.
<이만하면 괜찮음 죽음> 중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목격해야
우리는 죽음에 둔감해질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선천적으로 둔감하다. 그러나 둔감하다는 표현이 '잊는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후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기억에서 희미해져 간다고 해도 어느 한순간 봇물 같은 눈물이 터지는 것을 보면, '잊는다'라기보다 '잊은 것처럼 살아간다'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상실은 우리에게 죽음이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음을 강렬하게 상기시키지만 '당신의 몫까지 더 잘 살게'라고 말한다. 현실에 치여 여유를 느낄 사이 없었던 당신과 같아지지 않도록, 내 삶이 망가질 정도로 지나치게 당신을 그리워하며 슬픔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남은 시간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으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마치 한동안 당신처럼 죽는 일 내게 없을 것처럼......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삶 속에서 상기하는 일을 굳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인데'라거나 '하고 후회하는 게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거나 '이미 지난 것은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나 더 잘하자'내지는 '있을 때 잘해라'와 같은 말들은 언젠가 있을 끝에 대한 ‘부인'이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