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너무 평범한

그 어느 날들이 전부다

by 얄리

너무 평범했던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식구들의 저녁밥을 차리고 둘러 앉아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고 다 먹은 그릇을 모아 담아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 좋다. 오늘


어쩌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그리운 어느날이란 이런 날이 아닐까? 당연스럽고 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한때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 스쳐 지나치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날들이 사라졌을 때 느낄 공허에 대한 기시감. 가슴이 꽉 차는 행복감과 함께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올라온다.





내겐 너무 평범한 어느 날


내 기억 속의 남았던 어느날은 대수롭지 않다.


철부지 어린 딸이 학교라는 것을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달뜬 표정을 하고 리드미컬한 발동작으로 달려 나가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창문을 빼꼼히 열고 딸이 등교하는 뒷 모습을 바라보던 엄마가 문틈 사이로 손을 뻣어 '잘 다녀오라'고 팔랑팔랑 내젖는다. 학교까지 엄마가 따라와 주지는 않겠지만 언제든지 내 뒤에는 엄마가 있다는 안도감에 손을 들어 흔들다가 다시 돌아선다. 그리고는 울컥한다. '나는 학교에서 재미있게 놀거지만 나없이 혼자 남은 엄마는 외로워서 어떻하지?'하는 생각, 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는 다시 발을 구르며 학교로 향한다. 그때 보았던 엄마의 미소,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던 어느 날.


한쪽 벽에 유화를 세워두고 연신 다가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물감을 찍어 캠버스에 올리는 아빠, 딸은 아빠를 옆에 두고 스케치북을 펼쳐 놓은 채 손수 만들 종이인형을 그려 넣는다. 남자인형 하나, 여자 인형하나, 그리고 인형들이 입을 각종 옷가지들. 다 그려진 것을 가위로 싹뚝싹뚝 오려내고 만든 옷가지를 인형에 척척 걸쳐 본다. 남은 종이조각을 담으라고 비닐을 슬쩍 던져주는 아빠, 유화는 아직인가보다. 매일 봐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하늘에 주황색 점들이 더 늘어난 것도 같다. "아침이야? 저녁이야?" 갸우뚱 한 머리를 하고 묻는 딸에게 "저녁이야. 더 붉어졌잖아. 일출이 아니고 일몰"이라고 답하는 아빠. 그게 뭐든 그림 속 하늘이 예뻤던 어느 날.


제안 때문에 철야 작업을 하고 대휴(대체휴가)를 받은 남편이 점심에 임박해서야 침대를 벗어난다. "점심 어떻할꺼야?"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 "같이 먹을래?" "그러지뭐. 회사 근처로 와" 낡은 중고차를 몰고 회사 앞에 온 남편과 쭈꾸미볶음을 먹으러 간다. 식탐이 많은 나는 남편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꼭 3인분을 시켜 먹고는, 한껏 부풀어 오른 배를 꺼트린다는 명목으로 근처 강변을 나란히 걷는다. 전날 있었던 남편의 제안서 제출 에피소드, 아이의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 나의 회사얘기,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것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걷다보면 어느 새 집 근처까지 와 있다. 이쯤에서 다시 되돌아간다. 이야기는 1부를 마치고 2부에 접어든다. 그렇게 나란히 막간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야. 쿠키영상 몇개 있데?" 이미 영화는 끝났지만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좌석에 남은 건 우리 뿐만이 아니다. "잠깐 있어봐. 두 개라는데?" 아이는 급하게 핸드폰을 뒤적이다 말한다. 다시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남은 팝콘과 콜라를 입에 넣는다. 영화는 누워서 띵굴대며 봐야 제맛, 어벤져스 시리즈가 나오거나 전쟁영화가 나오면 어김없이 프리미엄관을 예매해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모자가 누리는 유일한 사치. 기어이 쿠키영상까지 다 보고 나서야 주섬 주섬 옷을 챙긴다. "이 슬리퍼 안 신었는데 챙기까?" 아빠가 프리미엄 관에서 나눠주는 1회용 슬리퍼를 잊지 않고 챙겨오라고 했던 말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어, 나도 안 신었으니까 이것도 챙겨" 가방에 슬리퍼를 집어 넣고 둘러 멘 후 상영관을 빠져 나온다. "재밌지?" "응, 근데 이거 다음에 하는 게 더 대박이래" 그렇게 다음 관람을 예정하던 어느 날.



언젠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

하늘이 노을로 물드는 것을 볼 때

한적한 산책길을 저벅 저벅 걸을 때

영화관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그 모든 평범함 속에서

엄마를, 아빠를, 남편을, 아이를

떠 올릴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요동은

잔잔했던 이 날들을 위한 것들

평범한 어느날,

그 날들이 전부다.


그 안에서 잘 놀다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