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들리던 덜 들리던
아이가 있는 부모의 입장이 되면 '아이와 관련된 주변의 시그널'에 민감해진다. 연애할 때 시그널이 10점 만점에 5라면 아이와 관련된 시그널은 9 정도랄까? 특히 그 시그널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것일 때 더더욱 그렇다. 워킹맘이라 아이의 일상에 관여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근무하는 회사와 집 그리고 아이의 학교의 위치를 모두 15분 거리 내에 좁혀 놓은 것은 그나마 필요할 때 바로 갈 수 있는 효율적인 이동 방경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저학년 때는 오후 근무 시간 중 양해를 구하거나 출근 전에 짬을 내서 학교와 관련된 봉사, 이를 테면 교실청소나 녹색어머니 활동을 하곤했다. 교실청소의 경우, 벽에 붙여진 '학습결과물과 각종 차트'는 간접적으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관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관심이 포괄적인지 편향적인지, 단체생활에 있어서 지켜야 할 규칙 중 아이가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유독 다른 아이들과 다른 것은 무엇인지 등 은연 중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청소가 끝난 후 담임 선생님과 짧은 인사를 나눌 때 그날의 특이사항이나 원활한 학교생활을 위해 집에서 좀 더 신경 써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고,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최근에 달라진 행동이나 태도 또는 유의하여 봐 주었으면 하는 점들을 전할 수 있었다. 녹색어머니 활동은 복장과 장비를 챙기기 위해 들린 전용공간에서 같은 반 친구의 어머니를 만날 때 듣게 되는 정보나, 봉사하는 와중에 아이가 등교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평소에 알던 것 외의 다르게 보이는 것들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활동보다 더 아이에 대한 직접적인 시그널을 얻게 되는 것은 학부모 상담을 통해서였다. 매년 2회씩 진행되는 학부모 상담은 바쁘거나 일정이 잘 맞지 않는 부모일 경우 전화로도 가능했지만 왠만하면 직접 대면을 택했다. 전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소리 외에도 대면 했을 때 분위기나 표정 그리고 몸의 움직임은 더 풍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상담이 있는 날이면 하루 종일 신경이 예민해졌다. 내 차례가 될 때까지 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교무실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겁많은 학생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한 일이 있기라도 한 것 같은 불안과 초조, 사회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떨림.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학부모의 마음이란 게'에 속하는 감정들일까 싶었다. 찾아오는 학부모마다 대면을 해야 하는 선생님의 입장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학생마다 지닌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부모가 궁금해 하거나 걱정하는 것에 대해 아이에게 맞춰진 피드백을 주어야 하며, 자칫 대화 중 불쾌하거나 좋지 않은 느낌이 상호간에 생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테니까 말이다. 학부모와 선생님 양쪽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필요한 자리, 학부모 상담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이를 좀 더 이해하거나 나의 관점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시그널이 있다.
친구들에게 바로 다가가기 보다
함께 얘기를 해야 할때만 말하는 편이에요.
그룹 활동 때 놓친 것을 친구들이 얘기하면
바로 인정하고 사과를 합니다.
공격적이거나 장난이 과하지 않지만
겁을 먹거나 주눅이 들어있지도 않아요.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상담시간에 본인이 관찰한 아이의 모습을 세세하게 알려 주셨다. 교우관계, 학습태도, 반에 소소한 분쟁이 일어날 때 취하는 태도, 말을 하는 방식 등을 말이다. 관찰에는 좋고 나쁨의 구분이 없었고,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평온함을 유지하는 일정한 톤이 있었다. 내게는 세세한 관찰의 결과들이 아이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 되어 주었던 것 같다. 지나치게 자랑스러워하거나 걱정스러워하는 시선이 생기지 않았고, 앞으로 아이의 어떤 면을 좀 더 바라봐 주어야 할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준비를 미리 해 줄 만한 게 있는지 묻자, "몸을 크게 움직여야 하는 일에 서툰 면이 있으니, 속도나 방향의 변화가 크고 불규칙한 운동으로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교실에는 화분들이 한쪽 서랍장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선생님이 가져다 놓으신 것인데, 학생들 한명당 하나씩 돌보도록 나눠 주셨다고 했다. 선생님에 대한 아이의 생각을 물었다. "인자하신 것 같아. 화를 내시는 걸 본 적이 없어. 늘 따뜻한 느낌이랄까?" 선생님을 떠올리는 아이의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선생님은 관찰이라는 행동과 태도로 감정의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을 은연 중에 가르쳐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로를 명확히 세우기엔 시점이 이르죠.
대부분의 아이들은 진로미정이 많아요.
부모님들은 빨리 찾기를 바라지만
부모님의 어린 시절도 그랬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명확해요.
자신의 생각을 주저하지 않고 밝힙니다.
하지만 때때로 주제와 상관없는 발언이거나
너무 독점적으로 시간을 쓸 때가 있어요.
특정 영역은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어요.
소방소 견학 때 설명하던 현직 소방관도
예리한 질문에 놀래더라구요.
상담을 했던 경험중 중 가장 인상이 깊게 남았던 분이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 이었다. 진학 후 학교적응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1학기 첫 대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아이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학생들의 학년에 따른 경향과 아이가 가진 특징, 수업시간에 취하는 태도와 주변의 반응, 아이만의 차별적 성향 등에 대해 아이의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 듯 재현을 해 보이셨다. 무엇보다 설명을 하는 선생님의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차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호기심은 나의 아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담시간보다 일찍 와서 멀찌감치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동안 선생님의 공간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드나들고 있었다. 담임으로 있는 반의 학생부터 이전 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학생, 수업시간에만 만난 학생 등. 대화의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저번에 잊어버리고 흘리고 간 책은 찾았니?"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아니요. 어디다가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답답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하는 학생들, 장난끼 가득한 몸동작이 동반되는 걸 보니 대화의 패턴이 일상인듯 자연스럽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선생님에 대해 묻자 대번에 웃음과 함께 "좋아! 수업 할 때도 재밌는데 수업 외에도 재밌으셔. 뭔가 말이 잘 통하고 편해"라는 말이 나온다.
담임 선생님의 말 중에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 있다. 다른 것보다도 교우관계에 있어서 무게를 많이 두고 있는 편인데,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소통의 폭이 좁은 편이라 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친구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물어보았다.
친구가 많고 잘 지내야 한다고들 하지만
아이들마다 관계의 폭이 달라요.
욕구가 없거나 두려워하는 건 아니예요.
특유의 (웃으며) 개그 욕심이 있어요.
친구들을 웃기려는 의도가 보여요.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 않은 대신 사용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의 표현이죠.
무엇보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몸에 벤
배려심이 있어요. 친구들도 알아요.
관계가 말로만 형성되는 건 아니니까요.
생각을 해 보니 나의 어린 시절의 교우관계와도 유사한 패턴이 보였다. 나 역시도 직접적인 대화 시도 보다는 행동으로 싸인을 보내거나, 호기심을 자아낼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소통을 했던 기억이 났다. 주변에 친구가 몰려 있었기 때문에 교우관계에 원활했다고 기억은 퉁치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깊게 이야기를 주고 받지도 않았고 홀로 지내며 친구들과 경계를 긋지도 않았다. 그게 내가 가진 관계의 폭이었다. 많은 듯 없을 수도 있는. 어른인 지금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는 거의 바닥까지 오픈하며 대화하지만, 대부분은 표면적인 수준의 관계성향을 지녔다. 물론 그 소수의 사람들이 생기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말이다. 퉁친 기억 속에 왜곡된 나를 보게 되기도 했고, 아이의 소통방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생각도 하게 되었다.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은 아이를 불안하거나 걱정스럽게 바라볼 일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게 바라보면 아이는 자신의 관계성향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니까.
도움이 되지 않거나 어떨 때는 불쾌하기도 한 시그널도 있다.
반항심이 대단해요.
외향적인 아이가 아니라 이런 아이가
커서 사회적 문제아가 되는 겁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학부모 상담, 교실문을 열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부모가 상담을 위한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맞추지 않고 45도로 틀어 바닥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어가던 담임선생님. 얼마 전 수업에서 아이가 자신의 수업 내용 중에서 틀린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가진 다른 성향이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봤지만, 이미 본인의 선입견에 몰입되어 있는 선생님의 시각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이가 가진 다른 장점이 있지 않을까요?" 일말의 다른 시각의 여지라도 가져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지만, 선생님은 "절대 없다"로 확실하게 단정지어 버렸다.
지금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없겠다 싶어 화제를 돌렸다. "생각이 다른 것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표현이 서툴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듯 해서 공격받는 느낌이셨겠다."라고 말하자 시선이 내쪽으로 잠시 돌려졌다. 통상적인 질문들을 하고 상담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지병으로 인해 학교 수업을 하지 못해서 임시 담임으로 교체하고 장기적인 병가를 낼 예정이라는 소식을 아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쉬러 가시기 전에 드리라고 홍삼 드링크를 쥐어 보냈다. 2학기 학부모 상담 시에 복귀한 선생님의 180도 달라져 있었다. 아이에 대한 분노는 사라졌고 호감이 가득했으며 45도로 틀어진 시선은 눈을 마주볼 수 있는 각도로 바뀌어 있었다. '다른 장점은 일절 없던 아이'는 '자기 주관이 뚜렸한, 발전 가능성이 많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중간에 나의 의도적인 개입이 있었으니 이 시그널의 변화는 전적으로 유효하다고 볼 수 없다.
친구들과 활발하게 어울리지도 않고
문제가 있냐고 물어도 없다고만 해요.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 선생님은 학부모를 20분 이상 기다리게 했지만 정작 마주했을 때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1학기 때도 그랬는데 2학기 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자리에 앉아마자 선생님의 시선은 45도로 비스듬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데자뷰처럼. 궁금한 게 뭐냐고 묻길래 교우관계를 얘기했더니 표면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서로간에 친분이 어느정도 있는 상태가 아니면 어른들 간의 대화에서도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라는 질문에 상대가 나의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이면 "아니오. 문제가 있긴요."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해서 수업시간에 태도에 대해 물었다.
특별한 점은 없어요.
제 수업시간에만 보니까 잘 모르죠.
도대체 다른 선생님들은 어떻게 아이의 특징을 파악해 왔던 걸까? 아이의 특징을 아는 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딱히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고 했다. 아이는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편차가 컸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범위를 한정시키고 관련된 쪽으로 질문을 바꿔 보았다.
미술 선생님이시라고 들었어요.
아이가 미술에 관심이 많아요.
수업시간에는 어떤 가요?
-
뭐, 딱히 그림을 잘 그리진 않아요.
'더 이상 대화가 의미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내 전공도 미술이라 아이의 그림실력이 눈에 띄는 수준인지 아닌지는 알고 있었고, 아이는 사실적인 그림보다는 자기가 관심이 있는 쪽의 그림을 자기 방식으로 그리는 편이었다. 사실적 묘사력은 부족하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조립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미술이 회화만 있는 건 아니니까.
거의 모든 것에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선생님이 유일하게 내게 적극적으로 설명한 것이 있었다. 메신저로 대화하는 와중에 아이가 선생님께 "000씨 핸드폰이 맞나요?"라고 물은 문장을 보여주며 어떻게 이런 문장을 선생님한테 보낼 수가 있냐고 기가 차다고 했다. "당황하셨겠네요. 담임선생님이신데 이렇게 문자를 보내서"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서 뭐라고 좀 하셨나요? 어른에게 이런 말투로 얘기하면 실례라고" 그러자 "굳이 말하기도 그렇죠. 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선생님께 보낸 문자에 대해서 집에 돌아와 아이와 얘기를 나눴다. "알려준 전화번호를 등록해 놓긴 했는데 잘못 등록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확인하려고 보냈지. 왜?" "000씨라는 호칭은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어른과 어른 간에 붙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거야. 상대의 직함이나 직책 그러니까 선생님이거나 부장님처럼 하는 일이나 직급을 알고 있으면 그걸 불러주는 게 가장 일반적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는 잘 사용하지 않아. 그렇게 부르면 나이 많은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이 무시를 당하거나 하대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거든. 특히 네가 '담임선생님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렀다면 기분이 상할 수 있어" 아이는 당황했다. "그래?" 몰랐던 거다. 선생님께 몰라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를 묻거나 틀린 것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을까?
아이에 대한 다양한 시그널
여러 선생님들의 대화를 모두 시그널로 포함시켜 표현한 것은, 엄마이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의 편향적 관점을 조금이라도 의식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아이를 어떻게 보고 있나? 아이는 잘 하고 있나? 문제가 있나? 선생님의 말에 숨은 의도가 뭔가? 아이에게 호감이 있나 없나?' 그렇게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글로 쓰진 않았지만 어떤 때는 매우 행복했고 어떤 때는 아주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 행복과 분노가 아이의 평가 그 자체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아니다하는 측면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것 같아 담지 않았다.
상담을 하다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아이가 두루두루 무난하게 모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장점이 무엇인가 보다는 단점이 있지 않나에 더 신경을 쓰고 있나?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바라봐 주기를 원하고 그쪽을 유도하지는 않나?
나쁜 방향을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그 생각을 바꾸고 싶어하는 건 아닌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의 양육의 평가로 받아 들이고 있나?
아이에게 얼핏 들은 것 중 유독 고칠점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고 있나?
듣게 된 의견으로 '아이는 이렇다.'라고 쉽게 단정하나?
학교 폭력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까, 조금의 여지라도 읽으려고 애쓰나?
아이에 대한 주변의 시그널이 없다면 나는 얼마나 아이를 알 수 있을까?
상담의 내용이 한정된 것은 그만큼 아이를 내가 몰라서는 아닐까?
내게 유익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중요한 건 내가 아이에 대해 가지는 나의 관점과 내가 취할 태도다. 아이와 보낸 시간의 양보다 시간의 질이 더 고려되어야 한다면, 좀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고 마음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벽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말고는 어른이 된 후에 아이들과 소통할 경험을 해 본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통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가 어른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를 맞춰야 할 텐데 어떻게 맞춰야 하지? 막막했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어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머리 속 창고에 먼지가 한가득 쌓인 기억들을 들추어 본다. 그나마 가장 최근이었던 기억은 힘들고 괴로워서 꺼내보지 않았던 것들 뿐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 밑에 있는 기억들을 무겁게 눌러 꺼내기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일단 밀어놓고 그 밑의 것들에 손을 뻣어본다. 엄마, 아빠, 어딧어? 좀 나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