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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Oct 05. 2018

필름 한 롤의 추억

일회용 카메라 라니

퇴사를 한다고 하니 따뜻한 회사 동료가 일회용 카메라를 건넸다. 회사를 담아가라고. 사실 이렇게 말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게 들렸다. (ㅠ_ㅠ)


코닥 일회용 카메라, 꽤 예쁘게 생겼다.


무얼 담으면 좋을까. 내 소중한 5년을 뭘로 담을 수 있을까.


처음엔, '사람들을 찍어야지' 했다. 헌데 아무래도 부끄럽기도 했고 24장 밖에 안되는 카메라에 누군가를 골라 담는 다는 것도 좀 그랬다. 그래서 내 출근길, 책상, 좋아하던 자리, 커피 등등을 소심하게 담았다.


몇년만에 잡아보는 일회용 카메라인가. 손이 나오지 않게 조심하고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란 말도 다 까먹고 이것 저것 찍어서 인화를 맡겼다. 메일로 사진이 도착했는데 첨부파일 이름이 .. ?


XXX이름 (실내 노출부족입니다).zip



뙇.. 압축을 풀고 열어보니 반 이상은 어둡고 침침한 노이즈 가득한 사진..ㅋㅋ 나의 회사는 이렇게 어둡고 침침하진 않았다. 화사했다. 단지 사진이 그럴뿐이다..


왼쪽이 보정 전, 오른쪽이 보정 후 (그게 그거)

#사진이 시작된 날. 모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모자이크 처리를 했는데 왠지 무섭다.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실내에서 플래쉬 없이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되는 것 이었다. (뒤로 갈수록 심해진다.)



#밖에서 찍은 건 이렇게나 색감이 예쁜데!



#출근길 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매일 똑같은 나날이라 사진으로 남길 것이 없어 슬픈 날엔 발사진



#출근 길 내가 보는 첫 장면. 언제봐도 기분좋은 장면이다.



#사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매일 아침 버스를 기다리던 곳. 저노무 꽁치사진도 엄청 찍었다. 날씨가 맑으면 모든게 좋지. 앞으론 어느길로 출근을 하게 되려나.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내려 육교를 건너 빌딩 숲으로 진입한다. 그저 뻔한 출근길이겠지만 사실 난 위 몇 장면들을 진짜 좋아했다. 그래서 되게 자주 사진도 찍었다. 매일 비슷해서 딱히 어디 올리진 않았지만 그냥 아래에서 바라보는 다리의 철골도 좋았고 양 건물의 대칭도 좋았다. 그냥 그랬다.



#이제 사무실. 사실 좀 더 밝고 좀 더 좋다. 사진이 너무 칙칙해서 슬프다. 3층에서 한 1년 반쯤 있었다. 그 전엔 8층에서 1년쯤 일했고 그 전엔 또 3층에서 2년쯤 일했고 그 전엔 6층에서 일했다. 사실 그 중에서 3층이 제일 좁고 답답하긴 했다. 그래도 간식이 그득그득 하던 저 자리가 약간 그립다.



#여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회사 카페테리아 옆 구석탱이였는데 회사 커피머신 중 젤 좋아하는 커피머신이 있는 곳 옆이었다. 맛있는 커피를 들고 높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면 멍하니 기분이 좋았다. 사람이 많을 땐 잘 가지 않았지만.  


이 사진으로 보니 영 기분이 안나서 예전 글을 첨부해본다. 이 글에 있는 사진이 딱 내가 좋아하는 그 느낌이었다. https://brunch.co.kr/@yamju/243

 



#이것이 바로 그 맛있는 커피를 공급해주는 그 커피머신이었다. 회사에 카페도 있고 다른 기계들도 있었는데 원두도 같은 것을 쓰는 듯 했는데 돈주고 사먹는 카페 커피보다 무상으로 제공하는 이 아이의 커피가 가장 맛있었다. 사진이 진짜 엉망이긴 해도 그냥 넣고 싶었다. 한동안 저 기계가 고장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우울했다.



#왼쪽 사진은 그냥, 크게 의미가 없네.. ? 오른쪽 사진은 내가 평소에 저 구도로 엘베 앞에서 혼자 사진을 많이 찍었다. 발사진 찍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는데, 궁금해서 플래쉬를 한번 터뜨려 봤더니 저 모양 ㅋㅋㅋ 웃기다 진짜 저 사진 ㅋㅋ



#이것은 내가 가장 애정하던 서비스랄까. 지금은 사라져서 더 애틋한 그 무엇. 저 박스 그냥 두고 왔다. 저 박스 자체도 굉장히 고생한 기억이 담긴 제작물이긴 한데 그래서인지 그냥 쟤는 남겨두고 오고 싶었다.



#라일라. 나는 라일라였다. 지금은 아니다. 또 다른 회사에 가서 라일라가 될지도 모르겠고 아닐수도 있고. 아 저 스펠링 때문에 첨에 누군가는 릴라 라고 불렀다 ㅋㅋㅋ (놀릴라고) 근데 진짜로 내가 스펠링을 잘못쓴걸까 생각해서 찾아봤었는데 오아시스 노래중에 lyla가 있었다. 가사에도 라일라 라일라 한다. 그리구 뉴욕에 여행갔을 때도 쉑쉑버거에서 내 이름은 '라일라'야! 라고 말해줬더니 Lyla라고 써줘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ㅋㅋ


#저 뒤에 사진은 조카 사진이다. 아들아님. 조카가 회사 어린이집에 다녔다. 그래서 퇴사를 생각할 때 실제로 조카를 자주 못보는게 서운해서 망설였었다. 우리아가 ㅠ.ㅠ


#내사랑 아지트. 회사에서 모두가 쓰는 협업툴이었다. 질문하기 보다 내가 찾아내기 좋아하는 나같은 검색 덕후에게 아주 딱 맞는 툴이었지. 퇴사 후 퇴사가 제일 실감났던건 믿기 어렵겠지만 아지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내게 SNS 같았던 이놈. 안녕..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업무툴이라 오히려 엉망으로 찍어서 잘안보이니 다행..)


 

#마지막 출근 날! 굳이 나를 찍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필름도 남고 나는 핑크핑크하고 날씨는 너무 좋아서 찍었다. 세상 어색하네 ㅋㅋㅋㅋ


#하늘 사진이 이렇게 잘나오는 구나 일회용 카메라님.


#망친 사진들로 마무리. 사실 왼쪽 사진은 어떤 회의실 사진인데, 나에게 안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회의실이다. 내 맘속에 묻어두라고 사진도 저렇게 못알아보게 나왔나보다 ㅋㅋ



막상 사진을 올리고 보니 엄청 회사 추억 뭐 그런건 아니고 일회용 카메라 체험기 쯤 되는 것 같다. 감동도 없고 교훈도 없는 글이라 민망하지만.. 덕분에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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