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순간들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온다. 허를 찌른다.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이란 일본 드라마를 틀었다. 당연히 빵과 수프와 고양이를 보려고 틀었건만 시작한 지 2분 만에 뼈 때리는 장면을 만났다.
디자인 시안을 가지고 와서 의견을 묻는 후배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은 뒤 생각을 듣곤 그럼 그렇게 상사에게 말해보라고 권한다. 일을 할 땐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정하는 게 먼저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기보단 부딪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준다. 물론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고 후배 쪽도 선배 쪽도 조금씩 경험해본 것 같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 장면에 가슴이 철렁하는 이유는, 아직도 내가 내 생각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어서일까?
평상시, 그러니까 일할 때 말고 일상 속에서의 나는, 점심을 고르든 가고 싶은 카페를 고르든 기호가 분명치 못한 사람이다. 호불호가 약한 사람이랄까.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선택에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일할 때도 그러면 문제가 좀 크겠지만 다행히도 일할 땐 그럴 수가 없으니 그렇진 않다. (아이러니함..) 아마도 일에 있어서는 근거가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어서 라고 생각하는데 예컨대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은 '내가 먹고 싶은 것'에 근거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하나를 고르는 게 참 어렵고 제휴를 할 것이냐를 고르는 것은 우리 브랜드의 방향과 맞는가? 투입될 리소스 대비 효과가 있는가? 등의 조금은 더 객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할 때도 결정이 어려운 경우가 꽤 있는데, 상대적으로 논리적인 근거에 입각해 결정하기 어려운 디자인이라든지,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어 근거로 삼을 데이터와 지식이 충분치 않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실 디자인을 예로 들긴 했지만 사용자의 경험이나 데이터 등 논리적인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주관적인 미의 기준 등으로 결정하게 되면 가장 크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 따라서 가장 어려운 것은 후자, 지식과 데이터가 충분치 않은 경우.. 물론 마케팅이란 업무를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쌓아온 경험은 있지만 산업마다 상황이 많이 달라서 쉽지가 않다. 그렇다 최근 겪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의견을 이야기하기가 많이 망설여지거나 심지어 한쪽으로 결정을 하는 것조차도 매우 어렵다. 기존 분들의 의견을 많이 구해야 하는데 연차가 쌓이다 보니 계속 의견을 구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 싶기도 하고 점점 생각이 많아지니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줄어든다고 해야 할까..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는 만큼 줏대 없어 보일까 걱정도 되고 참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함과 동시에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내면의 힘, 믿음을 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고민과 생각의 절대적인 양이 필요하겠지 조금 생각하고 잘 결정할 수 있을 거란 꾀를 어서 버려야지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 법인데 절대적인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고 잘 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인 거겠지
이러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힐링하려고 튼 일드로 인해 이런 자기반성적인 글이 생산되다니 참으로 세상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