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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니 Jun 02. 2022

한 잎의 여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금한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시집을 빌려 보았던지, 20대 때 마음에 드는 몇 개의 시를 복사했던 적이 있다.

그중에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가 있었다.

그때는 물푸레 나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냥 '그 한 잎'에 반복되면서 나오는

슬픔 같고 병신 같고 시집 같은 '여자'에 꽂혔다.

정말로 난 그 '여자'에 빠져들었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은 여자는 어떤 여잘까.

여리여리한 몸매에 하얀 피부,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원피스나 치마를 입은,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를 상상했다.

그런데 시의 마지막에 불행하고 슬픈 여자까지 읽고 나면 

기분이 울적해졌다.

순결하고 자유로운 여자가 끝까지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버리고 혼자서 추억만 하는 가상의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맑은 영혼의 여자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시의 1연까지가 좋았다.



지금, 이 시를 다시 생각한다.

한 시인이 있다.

5월, 그는 숲길을 걷다가 물푸레 나무를 본다.

짙은 잎 소나무와 넓은 잎 도토리 나무 사이에서

작은 물푸레 나뭇잎을 본다.

햇볕을 받은 물푸레 나뭇잎들이

투명한 연초록으로 빛난다.

보일 듯 말듯한 하얀 솜털 같은 꽃을 달고

미풍에 살랑이는 모습을 본다.

시인은 물푸레 나무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가득 고인 물이 흘러넘치듯이

시가 흘러나온다.



시인은 집으로 돌아와 시를 쓴다. 

정신없이 시를 쓰다가 왠지 구슬픈 마음이 든다.

자신의 감흥을 굳이 글로 표현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에 대한 슬픔이겠지.

그래서 2, 3연에 나오는 여자는 모두 시인 자신이 아닐까.

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가진, 시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인 자신.

그래서 슬픔 같고 병신 같고 시집 같고 불행한 시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나뭇가지를 잘라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랗게 물든다하여 물푸레나무라 부른다.

'물푸레'라고 발음하면 입안이 시원해진다.

물푸레, 물푸레, 자꾸 부르고싶다.

어쩌면 시인은 물푸레란 이름을 많이 써서

독자들의 입 안을 푸르고 시원하게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쇠물푸레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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