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메이도프는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회사를 설립하여 유명하진 않지만 월가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사업가였다. 그는 수천억대의 자산가였으나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나도 거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희대의 폰지 사기를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수천억원대의 자산가를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그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더 많은 돈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거물'이라는 상징이었다. 그가 표현한 '거물'의 구체적인 대상은 제프 베조스, 워렌 버핏,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이다.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모두가 알아주는 '진짜 거물'을 그는 꿈꿨던 것이다. 그 욕망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도달코자 했으면 좋았으련만... 일반적인 사업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깨닫고 더 확실해보이는 '단축적인?' 방법을 시도했었던 것 같다.
이미 충분한 달란트가 주어졌는데도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새로운 욕망들이 이전의 것을 대신하여 등장한다. 내게도 그러한 욕망이 존재한다. 길이 남을만한 멋진 디자인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것과 지금보다 더 뛰어난 사고의 영역에 도달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욕망을 위해서 나만의 깨달음을 계속 갈구하고 있다.
깨달음은 각자의 것이다. 누군가의 깨달음은 그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남의 깨달음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그것을 내 것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의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그럴싸한데 대부분 쉽게 잊혀지는 이유이다. 남의 도가 나의 도가 될 수 있다면 가장 도가 높은 사람은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책을 멀리할 이유가 될 수는 없겠으나 책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깨달음은 다 여러분의 몫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다른 UXer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일찍이 철학, 사회과학, 역사,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풍부했다는 점일 텐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얻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딱히 대답하기 어렵다. 생각하는 방법? 메타인지능력? 어느 하나에 귀속되지 않는 그물망 같은 사고력?
2007년 어느날 나도 '나만의 도'라는 게 분명하게 와닿았다. 임마뉴엘칸트의 것도 아니고 움베르토에코의 것도 아니고 나만의 생각, 사고방법, 가치관과 세계관이 틀을 형성했다. 직장생활 10년차이자 UX1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던 시점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완전 러프한 초기 스케치 같은 것이었다. 아직은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Hi-fi는 아닐지라도 Mid-fi 수준에는 도달한 것 같다. 내가 그 완성도(fidelity)를 높여나갈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노럭 때문이라기보다는 운이 좋아서였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자신만의 도를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UX는 갑자기 많은 기업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UX 컨설팅을 매개체로 나는 그 기업들의 핵심 사업에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주요 인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말이지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냥 나보다 나이든 아저씨, 깐깐한 인상의 옷잘입는 여성 임원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와 심도깊은 논의를 해야 하는데 아저씨면 어떻고 깐깐하다면 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막상 그(녀)와 얘기를 나누면서 생각치도 못하게 사고의 차원이 깊어질 때가 있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하며 속으로 당황했다. 정신이 화해지고 뇌세포들이 폭주하며 온 우주의 진실이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이 사람과의 대화에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미팅이 끝나가는 게 (드디어 해방이다는 마음에) 기쁘기도 하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어) 아쉽기도 했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해박한 지식을 지닌 사람도 있구나, 이 사람의 사고 경지는 도데체 어느 정도인가? 지금의 내가 과연 이 분의 도를 제대로 짐작할 수 있기나 할까? 어쩔 때는 1시간 짜리 미팅 한번에 그 한주의 기운이 모두 소진되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몇 번이고 방금 전의 미팅을 되새김질했다.
지금 와서 당시의 나를 칭찬하는 것은 그런 자리에서 주눅들거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얼버무리지 않았고, 그 기회를 천금같이 여기고 즐거워했다는 점이다. 그럴 때에는 소름이 돋거나 좌뇌 한켠에서 짜릿한 전기신호가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이전에는 잠자고 있던 뇌세포들이 깨어났던 것 같다. 정말 당시의 나를 칭찬한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우물안 개구리였을 것이다. 뭘 안다고 깝쭉댔을 것이고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을 것이다. 뭘 모르고 아는 지조차 생각안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말이다..
지금은 UX design이 예전보다 보편화되서 그럴 기회도 줄어드는 것 같다. 대중화가 되면서 특권 또한 사라진 것 같아 아쉽다. 가끔 중요한 보고 자리나 가야지 (그것도 가끔) 뛰어난 인물들을 만난다. 작년에는 그런 기회가 두 번 밖에 없었고 올해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나는 버나드 메이도프와 같이 거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없다. 단지 저 멀리 덴마크의 디자인 전공 학생이 내가 참여한 디자인을 보고 이렇게 감탄했으면 싶다.
"와. 이런 디자인을 만들어낸 사람은 도데체 어떤 사람이야. 꼭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