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 없는 여행자는 날개 없는 새와 같다
- 모슬리 에딘 사디
대만 여행의 목적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산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만 여행하면 떠올리는 것은 타이베이와 예스진지 정도일텐데 내 입장에서는 여러 유튜브 동영상을 봐도 그런 관광지들이 썩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만하면 산이지!!
아리산이나 옥산은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유명하다지만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매우 떨어졌는데, 다행히 1년전부터 외국인들에게도 렌트카 이용이 허용되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예약한 렌트카를 찾는데 헤매긴 했지만 공항에서부터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대만인들의 친절을 느끼며 3시간 거리인 자이시로 출발했다. 타이베이에서 남쪽으로 난 1번 국도(고속도로)는 도로 양편으로 거대한 고가도로가 평행을 달린다. 거대한 기둥 위에 올려진 2개의 도로가 거의 50km 가까이 평행선을 달리는 광경은 낯선 여행자에게 이색적인 첫 인상을 줬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정이 많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의 운전은 눈쌀이 찌뿌려질 정도로 별로이다. 대만이 이탈리아와 비슷했다. 사람들은 다들 친절한데 도로에서는 종종 불쾌감을 느껴야 했다. 6시에 해가 진 뒤로도 1시간 30분여를 더 가서야 자이시에 도착했다. 주유를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서 야시장을 찾아갔다.
자이시 외곽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아리산으로 출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만의 산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의 수많은 산길을 다녀봤고, 알프스 인근의 무슨 무슨 패스들과 좁은 산길도 다녀봤다는 자신감이 '아예, 전혀' 대만 산길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산길이 꼬불꼬불한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대만의 산길은 정말 '자유롭게' 휘어져 있어서 항상 긴장을 하고 주시를 해야 했다. 게다가 툭하면 차선을 어기고 뒤에 바짝 붙거나 무턱대고 추월하는 차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와 달리 터널이 거의 없어서 길의 굴곡도 다양하고 높낮이도 길마다 제각각이고, 낙석이 떨어져 있는가 하면 갑자기 길 한가운데 멈춰서 있는 차들도 있다. 직선이 이어지다가 한번에 꺾고 다시 직선이 이어지다가 한번에 꺾는 유럽의 산길은 지도상에서는 복잡해 보여도 의외로 운전이 쉽다. 자이시에서 아리산 가는 길, 아리산에서 옥산 넘어가는 길 외에 나중에 스펀-지우펀-진과스를 지나가는 길이나 양명산 올라가는 길도 이 날에 못지 않았다. (정작 최고 난이도는 타이중에서 타이루거 협곡으로 넘어가는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리산에 도착했다.
이번 대만 여행중 가장 좋았던 곳이다. 잘 갖춰진 산책로를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1시간 30분 가량 돌아다녔다. 보통은 아리산역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자오핑역까지 가서 하이킹을 시작하는데 그 길조차 놓치기 싫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멀지도 않았고...
아리산은 정말 가봐야 한다. 아직 우리나라와 유럽 위주로만 하이킹을 해봤지만, 아리산의 독특한 분위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쾌한 자연 풍경은 하루를 온전히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 이번엔 옥산으로 가자. 아리산에서 대충 점심을 먹고 한시간여 거리의 옥산으로 향했다. 들머리(등산로 입구)가 2500 미터라는 옥산. 정상은 못가더라도 갈 수 있는만큼 가자..고 했는데.. 왠걸. 가는 도중에 비가 온다. 고도가 높은니까 날씨가 예측불가하다. 옥산 등산을 포기하고 산 밑으로 내려오니까 거짓말처럼 날씨가 쨍해진다. 그렇다고 다시 차를 돌릴 수는 없고 해서.. 구글 맵을 열심히 뒤진 끝에 2일차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suspension bridge'(무서운 다리?)에 들렸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평범한 인도교인데, 높이가 4~500미터라는 게 이 다리를 suspension bridge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다. 이 부근에는 이러한 suspension bridge가 여러 개 있었는데 우리가 찾아간 곳이 가장 무서운(?) 곳이라고 한다. 사진으로는 실감이 안나지만 고소공포증 있는 사람이라면 못건너갈 정도로 무섭다. 협곡 사이에 놓았기 때문에 바람도 거세고 흔들리기까지 한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 위에서 뛰기도 했지만, 나는 안떨고 건너 다니는 것만 해도 큰 도전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밥을 사먹어볼까 했지만, 대만 현지음식을 도전했다가 괜시리 먹지도 남기지도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그냥 7/11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3일차 아침이 밝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오늘도 비가 내린단다. 오늘은 허환산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비가 온다기에 그것을 취소하고 아들과 상의한 끝에 타이베이로 가기로 했다. 비오는 데 괜히 산에 오르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일월담에 들려서 배타고 호수 위를 돌아다녔는데.. 대만 중부에서는 제법 유명한 관광지라서 다소 기대를 하고 갔었으나... ㅎㅎ 추천하지 않는다.
타이중을 지나 타이베이로 올라가는 길에 엄청나게 큰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렸다.
타이베이에서부터의 여정은 사실 그다지 할 이야기가 없다. 남들 하는 야시장 구경, 고궁박물관, 타이베이101, 시먼딩, 스펀-지우펀-진과스 구경 등이 3일 동안 이어졌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여행이었다. 독특하지도 않고 안가봐도 충분히 예상되는 그런 여행이었다. 다행히 아들은 매일 매일을 좋아했다. 어떨 때는 혼자 돌아다니라고 시키고 나도 혼자서 융캉제, 식물원, 중정기념관 등을 돌아다녔다.
그나마 기대했던 곳이 고궁박물관이었지만.. 정말 세계 4대 박물관이 맞나? 하는 의구심만 들었다.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유물이 적어서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이나 경주박물관, 공주박물관에 비교해서도 그다지 매력있지 않았다. 그림만 몇 점 샀다. 화보집을 살까 하다가 그럴만한 가치를 못찾았다.
타이베이101도 기다리는데 이미 지쳐서였는지 그다지.. 아들은 다 좋았단다;;
5일차 되는 날에 에류지질공원을 생략한 '스진지'를 돌아다녔다. 스펀에서 풍등을 날리고 지우펀을 구경하다가 진과스의 황금박물관을 가봤다. 도시를 벗어나서인지 나는 이 날이 그나마 재밌었는데, 더위로 인해 아들이 힘들어했다. 계속 가자고 재촉해서 하는 수 없이 일정을 서둘렀다.
아들과 따로 돌아다니기로 하고 타이베이를 혼자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
마지막 날에는 타이베이 북쪽의 양명산에 올랐다가 날씨때문에 등산은 못하고 꼬불 꼬불 산길만 체험한 뒤에 베이터우의 온천에서 마무리했다.
노잼 대만. 노잼 타이베이
올해는 아시아만 3군데를 여행했는데, 역시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에게 맞는 여행지가 있는 것 같다. 그걸 확인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사람들로 가득 찬 라오허제 야시장, 스린 야시장, 시먼딩을 다니면서 계속 생각했다. 차라리 제주도나 갈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