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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몫>

반대에 꼭 모욕이 필요한가

by 청반달

범죄는 모국에서! 그러자 누군가 조금 작은 소리로 따라 외쳤다. 강간은 미국에서!……
당신은 몸을 돌려 누군지 모를 사람들에게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한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인파 속에서 당신은 인파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말했다. 구호 중단하세요!

'낭만서점'을 듣던 중 여느 때와 같이 문장이 귀를 통해 흘러들어왔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해설을 듣고 나서야, 그저 시위 현장에서 나올만한 평범한 구호라고 생각했던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한눈에 문장이 들어왔다면 달랐을까? 평소에 스스로 엄청 예민하다고 자부했었던 나였기에 당황스러움은 더 컸다.


시위 현장, 집회라는 것에 참여했던 경험은 단 두 번뿐이지만, 그 현장에서 만난 친절이며, 따뜻한 사람들 때문에 시위라는 것에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 두 번의 집회가 마냥 평화롭고, 고상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상대를 깍아내리고, 비방하는 언어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 비방은 상대의 가장 약한 고리를 겨냥했고, 약자를 향했다. 그럼에도 집회 현장에 대해 좋은 기억이 주를 이루는 이유는 그곳에서 기대하지 못한 친절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집회에서 사용되는 폭력적인 언어가 내 주의를 끌지 못했던 이유는 집회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시위 현장에 어떤 주장을 전하러 그리고 그 주장이 먹혀들어서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며 나온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시위 현장에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명확하고 경제적인 언어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대개 욕설, 모욕을 주는 말일 수록 짧고 명확하고 강하다. 평화적 시위를 추구하는 와중에도, 말로 표현되는 폭력은 큰 거리낌 없이 군중 사이를 떠다닌다. 실제로 폭력이 사용된 것도 아니고 그저 말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훨씬 죄책감과 거부감 없이 입에서 나오는 폭력을 용인하고 동조하며 그것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폭력의 언어는 <몫>에서 보여준 것처럼 구호로, 노래로 사용되어 시위의 분위기를 장악한다.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느끼게 되는 카타르시스와 군중으로 퍼지는 동질감은 시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의 역할은 또래집단을 공고히 하기 위해 쓰는 아이들의 은어와 다르지 않다.


효율이라는 측면을 앞에서 짚었지만, 아무래도 모욕의 말이 집회 현장에서 자주 나타는 가장 큰 이유는 분노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위 현장에 주장과 함께 분노도 가지고 나온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분노는 사람들을 시위 현장까지 이끄는 힘이다. 분노는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한 목소리로 소리 내는 것과 같이 평소에는 경험하기에 매우 어려운 그 일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의분이라는 것이 딱 그 정도의 역할만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노를 촉발시킨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분노가 해소되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남은 분노는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자신이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그러므로 스스로는 정의롭다는 자만심도 한몫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우 손쉽게 의심 없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평소에 선택했던 방법을 고른다. 그게 바로 모욕이다. 설사 누군가가 잘못되었단 느낌을 받더라도 바로잡기 쉽지 않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작은 잘못으로 치부되어 무시되기 일수다.


그렇다면 그 폭력이, 모욕이 정말 효율적일까? 정말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게 하나?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시위의 성공을 위한 조건은 많은 사람의 참여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위에서는 폭력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낮아지므로 더 안전하다. 그리고 그 안전이라는 담보는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킨다. 결국 시위의 결과가 완전한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의 참여를 거친 것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 사이에 그 주제에 대한 합의점이 생겼다는 뜻이고, 변화의 필요를 인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당장에는 요원해 보였던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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