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밥상
나의 갱년기라는 클리셰는 지속 중이다. 새벽 한두 시에 깨고, 한겨울인데도 밥 먹을 때 땀이 나고. 나쁜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없어져버려 무감한 상태로 꼼짝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시간이 오기도 한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 원고를 쓰고 싶은 마음만은 계속 어어져서 신기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고통인데,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시간이 가치 있게 느껴졌고, 쓰다 보면 재미까지 느껴졌다. 엉뚱하게도 글을 쓰는 것이 나와 화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기도하는 마음과도 비슷했다. 설명하기 좀 어렵지만 그랬다. 함께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애정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서로 눈치도 보고 어떻게든 돌보려는 마음, 관심을 두고 귀기울여 들으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아주 짧은 순간 포착되면 발견해서 문자로 재배열했고, 그러면 마음이 다독여졌다. 포근하고 두터워졌다. 조금 질기고 튼튼해졌다.
글쓰기를 하면 용기를 내어 질문도 하게 된다. 이건 글쓰기용으로 던졌던 질문이다.
“엄마, 아버지 좋아하지요.”
“좋으니까 지금까지 살지.”
“하하하.”
부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듣기 좋은 답을 들었다.
‘노노 돌봄’이라는 말을 한 10년 전쯤 어떤 책의 홍보 문구로 처음 만난 거 같다. 그 말이 주는 쓸쓸함에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공포심도 느껴졌다. 관심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고,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임을 상기시켰다.
“우리나라는 2024년 12월 23일 기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서며 초고령 사회에 공식 진입했다. 불과 2017년 고령 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 14% 이상)에 진입한 지 7년 만이다.
19세기부터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인 문제를 오랜 기간 고민했던 프랑스가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가 되는 데 41년,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로 꼽히던 일본은 12년이 걸렸다.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연합(UN)의 ‘2024 세계인구전망’ 예상치를 종합하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비율은 2040년에 33.9%로 높아져 일본의 34.8%와 사실상 같아질 전망이다. 2045년 무렵에는 38%를 넘어서며 일본(36%)을 추월할 가능성이 크다.
출산율 급등과 같은 변수가 없다면, 2050년 43.3%, 2060년 45.2%, 2070년 46.4%로 치솟는다. 경제활동 세대 1명이 노인 1명 이상을 떠받치는 사회가 되는 셈이다.”
-출처: https://www.chosun.com/monthly/monthly_national/2025/11/01/Y6RRZR2MAFCPJPANMH4HBEAPBA/
2045년에 살아있다면 나는 72세가 된다. 38%의 우리나라 노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요즘 60대는 할머니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젊고 활기 있다. 법적으로 신체적으로 어떤지 몰라도 70이면 확실히 노인에 합류해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노인으로, 어떤 관계 속에서 있을까?
엄마는 짐짓 걱정스럽게 한편 조심스럽게 물을 때가 있다.
“책 만드는 거 하고 있어?”
혼자 사는 막내딸이 자주 내려오니 이런저런 걱정이 되셨나 보다.
“하하하, 걱정되셔요? 네, 하고 있어요. 다음에 만든 책 가져올게요.”
“우리한테 너무 잘할 거 없어. 니가 잘 사는 게 그게 효도지.”
2년여 동안 부모님은 농사일을 더 줄이셨고, 허리가 더 굽어 걱정이고, 걷는 것도 더 힘들어지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오시던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같이 밥을 차려먹는 것이 가능했다.
부모님과 내가 속한 공동체는 다르다. 마을과 도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밥상을 차릴 수 있다는 걸 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11월 30일이다. 1년 전 계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의 공동체가 파괴될 뻔한 커다란 위험이었다. 나의 출판업이 핍박을 받을 뻔했다. 이렇게 거대한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빠가 집에서 이웃사람들과 지금처럼 살 수 있어야 우리는 앞으로도 밥을 차려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출판업이 흥하고, 어린이 독자들이 행복해야 우리는 앞으로도 밥을 차려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작은 공동체들이 평화롭게 가능한 한 오래 지속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게 된다.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삶에 귀 기울이고,
오랜 침묵의 흔적을 따라 말해지지 않았던 시간들을
다시 짚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가까운 이의 생애를 다시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닌 관계의 재구성이며,
묵혀 두었던 감정의 재배치이고,
때로는 닫혔던 마음을 여는 이해와 화해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의 드라마>, 후마니타스
연약한 존재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고 종종 화가 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게 삶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조금 든다. 아직 잘은 모르고 조심스럽지만, 모두 약하다는 것을 각자 인정하고 서로 도우려고 하고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삶 아닐까. 우리 식구도, 모든 가정은 어쩌면, 연약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노노 돌봄의 한 사례’라고 이 글의 소제목을 잡았다가, ‘상호 돌봄’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방적인 돌봄은 없었다. 어떤 존재인지 발견해 가는 과정이었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영화 제목을 변용하지만, “먹고 얘기하고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소멸해가는 농촌 동네의 노부부, 1인 가정으로 사는 존재감 미미한 나라는 존재는 내세울 게 없다. 그런데도 이 글을 계속 공유하며 쓴 이유는 ‘관계’를 더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답을 아는 것처럼 썼지만 모르는 게 더더더 많다. 우리에게는 샘플이, 좋은 모델이 필요하다. 초고령화 사회, 에이아이가 바꿀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도, 연결되고 기대서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의 다양한 이야기가 공유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