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경쾌한 모습으로 배낭을 메고 버스 앞에 모인 사람들은 신나는 표정이다. 피곤에 지치고 찌든 삶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모습은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우리가 소속된 동아리에서 강원도를 거쳐 풍기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다.
센터장과 사회복지사, 센터소속 실무자가 동승해서 여행길을 만들어 주었다. 여성 가장들을 위해서 일자리 창출을 하는 0000은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돕고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다. 요양보호사를 양성해서 복지시설이나 요양원에 파견하고 베이비시터, 산모 도우미 등을 필요한 곳에 보내준다.
영등포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철도공사에서 하룻 동안 임대한 열차다. 학창시절 소풍 가방을 메고 떠나는 여행 인양 철부지 어린 세계로 돌아갔다. 센터에서 떡과 음료수 김밥 등을 준비해 왔다. 일터에서 수고한 회원들에게 하루 바람 쐬고 오라는 배려였다. 열차가 움직이자 레크레이션이 시작되자 마이크를 쥐고 노래 부르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깔깔거리며 웃는 사람 모두들 하나같이 절제된 삶 속에서 얽매였던 사슬이 풀린 자유인이 된다.
경북 영주 쪽의 골짜기에 다다르자 가파른 산 아래 바람도 쉬어가는 골짜기 아래 햇볕에 빨갛게 얼굴 붉힌 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휘어져 있다. 붉은 석류가 가지마다 예쁜 모습으로 달려 있다면서 옆자리에 앉은 L이 옆구리를 찔렀다. 나무에 달린 석류를 보는 건 처음이라며 신기한 눈길로 보는 우리 앞에 앉은 회원이 석류가 아니고 사과밭이란다. 태어나서 사과나무를 처음 본 것이다. 사과는 집 지붕을 넘는 감나무처럼 큰 나무에서 열린 과일로만 알았었다. 사과 수확을 하려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사과를 따는 줄만 알았는데 사람 키 크기의 나무 아래에서 걸어 다니면서 사과를 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과나무를 기르고 수확을 앞둔 농부의 부푼 마음은 붉게 익은 사과만큼 꿈도 영글어 갈 것만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일행들은 장을 돌며 쇼핑을 하거나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에는 각자 먹고 싶은 곳에 가서 식사를 하라고 하기에 우리 일행은 인삼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삼을 파는 시장 안에는 홍삼즙, 홍삼사탕, 인삼과 같이 먹으면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벌꿀 등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인지 시식용 홍삼즙을 홍보하는 가게도 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배고픔을 이길 수 없다. ‘인삼갈비탕’이라는 메뉴가 붙은 식당 문 입구 쪽에 앉아서 갈비탕을 주문했다. 식당 안에는 단체관광객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있다. 가게 출입문 입구에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갈비탕을 끓이는데 인삼 향이 강하게 퍼졌다. 주문을 받으러 우리에게 다가온 여주인이 투덜거렸다. 누군가 인터넷에 자기식당을 불친절하다고 불평하는 글을 올렸다면서 마리 우리 일행과 같은 관광객이 글을 올린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식당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모른다고 했더니 그냥 쓱 가버렸다.
그때였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L이 갑자기 가마솥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큰 가마솥에 끓여내는 LP 가스통에 연결된 줄 옆에서 불이 붙어 올라 호스 줄에 타 들어 가려는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뛰어!” 하면서 가방을 들고 L의 손을 붙들고 밖으로 뛰어나오는데 식당 주인은 재빠르게 가스 밸브를 잠그더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한다.
“괜찮아요. 위험한 게 아니라니까요.”
천연스럽게 말했지만 조금만 늦었어도 엄청난 인명피해가 났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우리는 여행 갔다가 세상이 떠들썩한 대형사고롤 당해서 저세상 사람이 될 뻔했다. 홀 안에 태연히 식사하고 있던 손님들이 식사 도중 밥값도 계산하지 않고 나가버렸다면 하루 영업이 허탕 칠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냉철한 판단력으로 침착하게 현장 수습을 한 주인의 발 빠른 행동은 혀를 내두를 만큼 신속했다. L이 그 순간을 빨리 본 것은 우리 일행뿐 아니라 식당 주인과 식당 안에서 식사하던 관광객들에게도 천운이었다. 가스 연결 줄에 불이 붙으려는 다급한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우리 일행 셋뿐이었다.
점심식사후 열차는 강원도 함백탄광 쪽에 섰다. 70년대 후반에 대형 탄광 사고가 났던 곳이다. 광부들이 탄광 열차를 타고 탄을 캐러 갱 속으로 들어갈 때 하루의 무사를 기도하던 가족들의 애환이 서린 광부들의 사택은 폐광되면서 주인을 잃고 흉물처럼 서 있다. 기차의 기적소리에도 흔들림 없는 평정을 유지한 산속에는 햇살에 곱게 물든 단풍이 무리 지어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사과나무를 보았고, 비록 폐광이지만 과거엔 서민들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서민경제의 주역을 맡았던 광부들의 일터였던 탄광촌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열차를 전세 내서 단체관광을 한 것도 행운이었지만 무엇보다도 LP가스 줄에 불붙은 것을 발견해서 폭발 직전에 가스를 차단해서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