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등된 거실 한쪽에 푸르스름한 비상등 불빛이 새어 나온다. 침실 문을 살며시 열고 방안을 둘러본다. 어르신들은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고 코를 드르렁거리며 숙면에 취해 있다. C할머니가 몸을 뒤척인다. 이불을 덮어주며 주무시라고 말하자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여기까지 살아온 날이 한스럽다며 훌쩍거린다. 흘러내린 눈물이 베개 커버를 적시었다. 과거 그늘진 어둠의 그림자는 늘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계모가 들어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나보고 죽으라고 때리고 꼬집으면 정말로 죽고 싶었어. 도망가려고 해도 갈 데가 없어서 모질게도 그 매를 다 맞고 살아왔어. 하루는 집을 나가려고 보따리를 싸놓고 어디로 갈까 생각했는데 갈 곳도 없고 동생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주저앉았지.” 아버지는 객지에 일하러 나갔다가 손님처럼 가끔 집에 다녀가곤 했다. 계모의 학대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로 자리 잡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와 계란형의 얼굴은 꽤 예쁜 얼굴이다. 항상 얌전히 앉아있고 어떤 요구나 불평도 하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70여 년 전에 학대당했던 아픈 기억에 가끔 눈물짓는 할머니의 모습을 전에도 몇 번 보았다. 성격상 계모에게 저항할 만큼 다부진 강한 성격도 아니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보니 가슴에 맺힌 한이 세월이 흘러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가끔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요양원이라고 하면 죽을 때 까지 여기서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 마음에 상처가 가지 않게 설명하려면 육하원칙을 써서 말해도 이해하지 못한 분들도 있다. 아들 밥 차려줘야 아침 일찍 일 나간다며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달랜다. 아침밥을 먹지 못 하고 굶고 출근할 아들을 위해서 밥 차려 주려 한다며 옷 보따리를 들고 나올 때가 있다.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순간순간 마음을 찌르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나타난 증상이다. 어려서 받았던 옛 상처는 그대로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 상처는 불쑥불쑥 먼 과거 속으로 끌어들였다. 흐느끼는 그녀에게 달리 해 줄 말이 없다.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내 마음을 전할 뿐이다. 언젠가 집에서 옷을 다리다가 뜨거운 다리미가 발등을 살짝 스쳤다. 피부가 벌겋게 됐는데 소독약만 몇 번 발라주었다. 괜찮아지는 것 같아 그냥 놔뒀더니 어느 순간 환부에 물집이 부풀어 오르고 가렵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한 결과 환부가 둥글게 벌겋게 자리 잡았다. 병원에 다니며 여러 날을 치료받았다. 처음에 소독만 철저히 했어도 쉽게 치료될 상처 부위를 키워놓은 꼴이 되었다. 주인의 무관심에 피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다행히 상처는 나았고 잊었다. 마음 쓰지 않고 하찮게 생각하면 작은 상처도 저항하면 몸이 고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드러난 상처는 치료가 끝나면 곧 잊어버린다. 치료도 쉽고 나으면 끝이다.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속의 상처는 가시처럼 마음을 할퀸다. 마음으로 받은 상처는 마음으로 다독이는 게 치료의 방법이다. 할머니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 때문에 지금도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시절에 계모의 학대는 계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마음속에 가시로 남아 있었다. 희미한 기억 속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물결처럼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수시로 찾아왔다. 계모와 화해하지 못한 그녀는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고 어두운 과거 속을 맴돌고 있다.
어려서는 계모의 학대를 피하려고 가출을 계획했지만 이루지 못 했고, 지금은 아들혼자 살면서 굶고 생활할까 걱정되어 틈만 나면 집으로 간다고 옷 보따리를 챙긴다.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보챈다. 지금 밤중에 버스가 끊겼으니 자고나서 내일 아침에 가자고 하면 실망한 얼굴빛이 역력하다.
창밖에 내린 비가 유리창에 부딪친다.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살며시 닦아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린 시절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사랑의 표현이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마음이 저려온다. 비 오는 날에는 유난히 우울해진 할머니의 기억은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있다. 미움도 분노도 다 털어버리고 이제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 살며시 문을 열고 나오는 내 발걸음이 바윗덩어리처럼 무겁다. 바람을 타고 온 비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내면의 분노도 비와 함께 사라지기를 바란다. 요양원 거실 비상등 푸른빛이 바르르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