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더불어 내가 하루를 사는 데에도 온 동네가 필요하다.
독립과 동시에 거의 두문불출하고 살았다. 집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을까. 나는 집과 연애를 하는 사람처럼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물 기호증을 앓고 있다거나 은둔형 외톨이는 또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도 글 작업과 실랑이를 하다 보면 종종 그런 날들이 지속되기는 한다. 문제는 현관 앞에 택배 물건이 와 있음에도 까마득히 모르고 지낸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건물은 경비실이 따로 없다. 그렇다 보니 현관문 앞에 물건을 놓아두고 가는 일이 잦다. 내가 집에 없다면 당연하지만 내가 집에 있음에도 알림 없이 살짝 물건을 놓고 가기도 한다.
현관문이 네 개라 내 집 앞의 택배가 며칠 씩 그대로 있자면 옆집 할머니가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문 앞에 택배 와있던데, 어디 멀리 갔나 봐요?]
내가 집을 오래 비울 땐 택배물의 보관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것이 먹을 것이면 꺼내 먹어도 좋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상자로 배달되었을 내용물은 나 혼자 먹기에 버거운 양이다.
제주에 사는 친구가 종종 귤을 보내온다. 택배를 보낼 때는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보내라고 말을 해뒀음에도 귀찮아 그냥 보내는 날이 있다. 어쨌든 귤 상자가 배달되어 오면 나는 상자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귤만 먹고살기도 한다.
알림도 없이 불쑥불쑥
무심한 듯 네가 보내온 귤 상자가
주인도 없는 집 앞에
부려진다
마음의 감기를 앓는 내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감기엔 비타민이 으뜸인 양
약처럼 보내온다
어디서도 이제
귤은 먹지 못할 것 같다
모양 비슷한 것들만 봐도
네가 떠올라서
오늘도 귤을 먹는다
귤만 먹는다
네가 보낸 귤이 상할까 봐
네 마음이 상할까 봐
부지런히 먹는다
허겁지겁 네 마음을 먹어치운다
귤만 먹는 상황을 글로 적어도 보지만 어디 귤뿐일까. 배달된 그것이 음식물이거나 식재료라면 나로선 상하거나 썩도록 그냥 둘 수 없다. 고향에서 부모님이 농사지은 것들을 보내올 땐 특히 그렇다.
어떤 때는 보내오는 양보다 택배비가 더 나갈 때도 있지만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생활하는 딸이 끼니나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걱정스러워 보내는 마음이자 사랑이다. 장기간 그냥 둬서 상하거나 썩어서 버리게 되는 상황은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일 년의 농사를 망친 것과 다름없다. 노구의 몸으로 텃밭에 채소를 기르고 몇 평 안 되는 논에 벼를 키워 얻은 일 년 동안의 노고가 고스란한 것들을 먹어주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죄송한 일인가 말이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먹는 것이며 사랑을 먹는 일이다.
나는 계절이 바뀐 줄도 모르고 가을에 여름옷이나 겨울옷으로 문을 나서기도 한다.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어느 계절에 와있는지 감각 없이 지내던 날들이다.
"택배가 어제 점심 무렵부터 그 집 문 앞에 있던데……, 또 어디 다녀왔나 봐요?"
"네? 내내 집에 있었는데요."
오후 늦게 공원에서 만난 옆집 할머니는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제부터 내내? 어떻게 종일 한 번을 안 나와 볼 수가 있어?"
"특별히 나갈 일이 없어서요. 초인종도 안 울렸고 현관 앞에 둔다는 문자도 없었는걸요."
옆집 할머니는 나를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그냥 웃고 만다.
아무튼 옆집 할머니가 나를 이해 못하는 것도 충분히 짐작한다. 집이 넓다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결코 넓은 집이 아니다. 종일 집 안에만 있자면 답답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넓은 집을 보면 관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부터 드니 내게는 충분한 공간의 집이다.
청소하는 일에 내 시간을 잔뜩 할애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럴 시간에 게으르게 앉아 멍을 때리는 편이 훨씬 더 좋다. 공원의 나무 밑 벤치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거나 하는. 나뭇잎 사이로 반짝반짝 내리치는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느끼는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