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기꺼이 가주지

by 양수련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고 마음은 책상머리를 떠나 있었다. 종일 노트북을 마주하고서 한 줄의 글도 써내려가지 못하는 날이 속수무책으로 늘어가던 때였다. 뇌의 방전. 책을 읽어도 내용이 머릿속에 스며들지 않았다.


나이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행이란 말에 생기가 돋았다. 게다가 청춘과의 자유여행이라니. 무조건 가야했다.


“친구랑 간다더니, 왜?”


“다들 나랑 휴가가 안 맞아.”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태국여행을 간다고 좋아하던 정은이다. 친구들과의 여행이 순조롭지 않다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 덕분에 생각지도 않던 제안은 내 차지가 됐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함께 갈만한 사람도 나뿐이고, 시간이 자유로운 사람도 나뿐이었던 듯.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모, 어디 가고 싶어? 태국 아니면 일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일본.”


몇 해 전부터 일본 배경이 나오는 소설을 진행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고민의 순간도 없이 일본이라고 말해 버렸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 길로 여행을 준비하는 것은 경험을 핑계 삼아 모두 정은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항공권을 예매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일정을 짜는 것까지 모두 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면서 모니터와 눈싸움을 한 게 다였다. 여행을 떠나는 당일까지도.


병원에서 근무하는 정은인 주말마다 3박4일의 일정을 조금씩 소화했다. 메모한 일정을 내게 보내왔고 상의할 일이 있으면 궁금증을 시간도 없이 보내왔다. 보고서를 검토하듯 미흡한 것을 챙겨 조언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해외는 패키지여행이 전부였던지라 자유여행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한데 뒤섞였다. 그러다가도 그래봤자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한국 여행자들이 많다니 한국말만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걱정을 떨쳤다.


여행 당일, 인천공항에서 만난 정은인 내게 절로 미소 짓게 했다. 몇 달 동안 보지 못한 정은인 바람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서로를 찾아 공항 내를 헤매고 난 다음이었다. 여행하는 동안 상충된 의견으로 서로 다투게 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은이의 웃음은 환했다.


여행은 이미 시작됐다. 환전을 하고 와이파이를 빌리고 셀프 체크인을 하고 수하물을 맡기는 일까지 정은인 한달음에 해치웠다.

기꺼이 가주겠다고 말한 사람은 나였지만 세대 차이를 느껴야하는 나와 기꺼이 동행을 선택한 쪽은 정은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내게 여행을 가자고 했는지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대학생이던 그때, 구두를 신고 대구의 팔공산 정상을 밟고 능선을 탔다. 발이 아프다는 생각도 없이 위험하다는 생각도 없이 산을 탔다. 정은인 여행 내내 샌들을 신고 누볐지만 아프다는 말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이모, 여행갈까?”


내가 그 말을 정은이로부터 또 들을 수 있을까. 여행 삼일 째부터 내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을 때, 정은인 그 말을 금기어로 정해버렸다. 한번만 더 하면 혼자 가야한다는 엄포를 놓았다. 낮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서운함을 뒤로 감춘 채였다.


나는 무슨 배짱으로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숙소로 돌아가자는 말을 했을까. 그런 나를 위해 정은인 타지 않아도 될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고 택시를 잡아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사카의 여름은 무덥고 열기는 정수리와 발바닥을 통해 분출되고 있었다.


청춘의 무모한 치열함과 발바닥에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듯한 나의 힘겨움이 어우러진 오사카 여행이었다. 오래 걸어도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왔어야 했다. 청춘을 따라 걷는 일은 밑창이 푹신푹신한 운동화부터 챙겼어야 했다. 걷는 일에는 자신했는데 얕잡아봤다.


팔공산을 구두 신고 오르던 그때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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