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omoca Aug 09. 2016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자

개 한 마리가 죽었다. 임종을 지키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곳은 턱없이 부족한 지원으로 수백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를 돌보는 보호시설이었다. 뒤늦게 SNS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올라온 추모의 글을 읽었다.


그 보호시설에 갈 때마다 격렬히 반기던 모습이 생각난다. 가까이 가면 철망에 온몸을 비비며 손길을 바라곤 했다. 견사 안에서 함께 뒹굴며 놀았던 적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 다른 봉사자를 물었다며 철망 사이로 간식만 주고 간 적도 있었다. 추모의 글을 읽으며 자연스레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안타까움도 더했다. 하지만 글의 말미에 쓰인 한 문장은 그 안타까움과는 조금 다른 여운을 남겼다.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자.





현실이 그렇다. 평생을 한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개가 몇이나 될까. 기껏해야 열 마리에 한 마리 남짓한 수준이다. 전국의 유기동물은 10만 마리를 넘어섰고 대부분 길거리에서, 혹은 보호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처음엔 이런 통계가 믿기지 않았다. 길거리에는 주인과 함께하는 행복한 개들뿐인데, 정말?


보호시설을 가보니 정말이었다. 한 평 남짓한 견사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는 수백 마리의 유기견과 유기묘를 보니 정말이었다. 활자만으로는 와 닿지 않았던 현실을 오감으로 사무쳐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옛말이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날 자신이 없다.





우리가 흔히 '보호'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의 보호소는 이 생명들을 온전히 보호하기엔 그 환경이 너무나도 가혹하다. 더 나빠질 것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적어도 현재 유기동물 보호소는 사람에게서 버려진, 불쌍한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보호소니까, 많은 단체의 후원으로 보호소에서 잘 먹고 잘 살 것이라는 심리가 들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책임져야 할 생명을 버리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직도 보호소의 이름이나 장소가 노출되면 도와주시는 사람들만큼 유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보호'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기대감, 책임을 회피하기에 딱 좋은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현실이 이러니 다음 생에는 개로 태어나지 말자는 글이 더 아프게 다가온다. 저마다 생명의 가치가 다르다는 사회적 인식을 표현하는 것 같아 더 아프게 다가온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돕고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세태가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분명 처음부터 개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세상은 아니었다.


동물로 태어나든 사람으로 태어나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는 일련의 것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조금 더 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에게서 버려진 동물들을 돕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행동에 내재된 가치는 나보다 힘든 생명들을 구분하지 않고 돕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한다는 것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