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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 기 홍 Jun 25. 2020

나는 옷을 잘 입고 싶다.

인생의 향기가 담긴 옷.

옷 잘 입었네. 잘 어울린다. 딱 네 옷이다.


흔치 않은 대화를 들었던 건 어제 오전의 산책길이었다. 아니 산책이라기 보단 강도

높은 걷기를 한 시간이었으니, 운동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주로 다니는 성북 천변 길을 출발해 시청까지 걷는 청계천 길에서 시청

앞의 분수대 근처에 앉아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쉬던 때였다. 돌로 된 천 변의 계단에 앉아 좌측 옆의 두 년분들이 나누던 대화를 듣다

보니 일반적인 대화가 아닌, 지나는 사람들의 행색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다.


그분들은 저 사람의 차림새는 이러니,

저 사람의 스타일은 저리니 하면서, 옷과 성격을 연결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좋아. 좋아.

참 잘 입었네. 과 하지도 그렇다고 누추하지

않게 잘 입었네." " 에이~ 저기서 신발이 아니네. 신발이 너무 어려워. 기왕이면 가벼운 운동화가

더 좋은데." " 저 모자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네. 나도 비슷한 옷들이 있는데 저 모자라면 좋겠는데?" 대화가 더 들려올수록 그분들을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갔다.


그분들도 분명 내가 힐끔거리는 걸 아실 텐데

전혀 개의치 않고 두 분 만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연히 뭐 하는 분들일까? 궁금은 하였지만 묻기가 그리 쉬운가. 내 상식선에서

몇 개의 직업이나 취미를 떠 올려 봤을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 동안, 독특한 대화의 오감을

즐기다 엉덩이를 툴툴 털고 성북천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쉽게 다치기 쉬운 살갗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동물의 피륙으로

시작된 재료들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소재로 바뀌면서 오늘날의 의류로 발전했다. 여기까지는 구태여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한 겹 브레이지어도 옷이고,

속살이 비추는 시스루도 옷이다. 멋진 슈트도 옷이요, 정갈한 한복도, 화려한 파티복도

옷이다. 나무껍질도 나무의 옷이요,

동물의 털도 그의 옷이다. 자동차의 도색도

옷이고, 건물의 페인트도 옷이다. 심지어 책

커버도 옷이고, 휴대폰 케이스도 옷이다.


즉! 무언가를 보호하는 것도 옷이지만,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도 오늘날 옷의 역할이다. 본래의 역할을 확장시키는 것에 능숙한 현대사회에서는 노멀 하고, 심플한 것들도 좋아하지만. 하이브리드나 멀티를 뛰어넘는

것에 더 열광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까의 년분들의 대화가 나도 모르는 새  

내 입에서 다시 되뇌는 것을 알고 청계천 다리

밑 시원한 곳에 잠시 앉았다. 그분들은 단순히

옷이 비싸고, 싸다는 대화를 나눈 게 아니었다. 옷과 성격과 사람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 연륜으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꾸며진 모습을 보면서  인성 파악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자신 역시 옷을 입는다는 것에 크게는

아니었지만, 항상 작은 신경 정도는 쓰고 살았었다. 그중 큰 이유는 보이는 순간에 평가되는 나를

최소 나쁜 인상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굳이 옷에 관한

격언이나 속담을 들춰 볼 필요 없이 사람의 첫인상에 강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무리

꾸며도 볼품없는 외모에, 바랄 것 없는 욕심이 줄어들면서 더 이상 노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완 달리, 지금껏 대수롭지 않았던, 솔직히

사는데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또 하나.

전에는 귀찮고 불 필요해서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날마다 하고 있는 것이 생겼다.


그것들 중에 하나다.


대화를 자주 해야 한다. 기존 관념의 탈피와
재 정립을 반복하고, 관점의 대상을 보다 멀리,
더 깊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서
있는 삶의 위치가 가능한 어디쯤인가를 자주 확인해 봐야 하고, 과연 내면의 옷을 제대로
입고 있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사색을 즐기되 예단하지 말고, 말을 하되 행동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인간은 생각으로 이루어졌고, 그 생각의
발현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것들이
일치했을 때 비로소 내 몸에 맞는 옷처럼, 내면의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날마다 습관이 되기 위해 하고 있다.


요 며칠 간격으로 코로나 19로 인한 판매

저하로 쌓여있던 명품들이, 시중에

평소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팔리고 있다 한다. 그것들은 풀리기가 무섭게 완판 내지는, 

거의 소진되다시피 판매됐다고 들려온다.

그것에 대해 아는 몇몇 사람들은 때론 육두문자

를 써 가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예상하듯이

가방 따위를 비싼 가격에 구입하느니, 계층 간의

심화를 부추기고, 이 시국에 쩔쩔매는 사람들이

천지 삐까린데 한심하다는 말이 주를 이룬다.


나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에겐 평소에 바라던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살리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원하는 을 입는 중이다. 그것이 어울리냐는 문제는 극히 주관적 관점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행복이다.

그 행복의 결과물이나 과정은 누구도 같을 수

없다. 나와 다른 행위나 과정을 지녔다 해서

궁금은 할 순 있지만 결코 무시나, 조롱, 멸시는 다른 문제다. 그 행위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고, 않는다는 전제로.


모든 재화는 각자 쓰임새가 다르다.

누군 좋은 책. 누군 좋은 옷.

또 누군 좋은 술, 음식, 도구, 장비, 여행 등.

저마다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간다.

재벌이 아닌 이상, 아낄 건 아껴가면서.


때가 있을 뿐이다. 누구든 그때를 맞이하면

그에 맞는 것을 하면서 성숙해지면 되는 것이다.

성인군자처럼 사는 것은 그들이 하라 하고,

나는, 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그때의 자신을 발전시키면 될 노릇이다.

단지. 그때가 도래했음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지나치면, 결국은 추해져 버린 자신의 모습에서

남루한 을 입은 인생을 보게 될 것이니, 부디

그때를 잘 알고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 그 사람. 옷 참 잘 입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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