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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Dec 30. 2021

생시(生時)를 대보시오!

유난히 분주하던 어느 날, 모자(母子)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왔다.


훤칠한 30대 중반의 남성과 깐깐해 보이는 60대 여사님.

중요한 상담 전화  중이라 건성건성 인사했더니 여사님이 대뜸


"가자!  여긴 바빠서 손님 취급을 안 하네.."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죄송합니다~ 하고 자세를  낮췄더니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제일 앞 동으로 매매 나온 거 하나 보여주시오"


했다. 앞 동에는 매물이 4층 하나밖에  없다 했더니


'4층? 4자는 싫은데?' 하고 인상을 찌푸리시길래

미안한 마음에  '일단 구경이라도 한 번 하시죠~' 하고 가서 보여드렸더니, 집을 성격대로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대뜸


" 아야 이걸로 계약 하자!  주인 오라 하시오!"


했다. 뒤에 섰던 남자가 더 어리둥절하여


"어머니!  왜 그러세요. 오늘 이상하시네.."


하며 여사님을 사무실 밖에까지 끌고 나가 한참을 만류하는 듯했지만 여사님은 다시 들어와 단호하게


"주인 오라 하시요 계약서 쓰고 갑시다!"  


했다. 


매도인과 만나 계약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여사님께 전화가 왔다.



ㅡ 생시(生時)  대보시오!


ㅡ 네?


ㅡ 아무래도 내가 오늘 이상해. 생시 대보시오!



얼떨결에 생년 월일과 생시를 댔더니 한참을 뭐라고 중얼중얼하더니



ㅡ 아이고 딱이네.. 오늘 나랑 합이 들었네. 어쩐지.. 거길 그렇게 들어가고 싶더라~.



내용인즉슨,

서울 살던 여사님은 아들이 이곳으로 전근을 하게 되어 며칠 전부터 왔다 갔다 하며 찍어두고 보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3일 만에 겨우 조건을 맞춰 계약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아들 차로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다가  갑자기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단다.  그래서 시간 없다는 아들을 설득해  억지로 들어온거라 전화통화에 여념없는 내게 호통을 치게 된 것이었다.


여사님은 심심풀이로 사주 철학을 공부하신 분인데..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그날 일진을 따져보고 하신다나?  아무튼 통화하느라 빨리 응대 안 해준다고 역정까지 내고 원치 않는 층 집까지 봤는데, 어인 일인지 너무 계약이 하고 싶더란다.


만류하는 아들 말도 무시하고 원래 계약하기로 약속된 집 만남도 캔슬하고 계약을 서둘러 마치고 돌아갔는데... 집에 돌아가 저녁 상까지 물린 뒤에 생각해보니 뭐에 홀렸나 싶어 뒤척이다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내 사주를 물어보더니 본인이랑 합이 들었대나 뭐래나...


여사님은 아들과 함께 입주해 살다가 약 2년 후 다시 이사 나가셨는데, 당시가 최악의 불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금액에 금방 팔렸다.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을 때라 샀던 금액보다 손해 보고 팔았는데도 어인 일인지 이 분은 정말 흡족해했다.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런 불경기에는 아무리 가격을 내려놔도 안 팔리거든. 그런데 이렇게 금방 팔리다니.. 이 집을 내놓기 전에 혹시 몰라 서울 집도 싸게 내놨는데 한 번도 연락 안 오드라고. 난 우리가 필요할 때 팔린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잔금 날 고맙다며 선물을 사들고 오신 여사님은,  여기저기에  집이 몇 채 있는데 이렇게 금방 금방 사고 판 집은 없다면서 우린 서로 참  잘 맞는 좋은 인연이라고 말했다.


또 사무실 자리가 명당자리라며 정신을 집중시키고 맑게 해 주어서 계약도 잘 될 거라고, 언젠가 꼭 다시 오겠노라 덕담까지 해주셨다.


시작도 마무리도 모두 기억에 남는 인연이었다.

그분 말씀대로 우리가 진짜 명리학적으로 서로 맞는 인연이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조우할 일이 없던 사람들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나 인생사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헤어진 뒤에도 좋은 여운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거야말로 좋은 인연인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중개업을 하더니 갈수록 비과학적이 돼간다.' 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집에도 임자가 있다"는 말이 회자되는 것처럼 같은 집을 수십 번 보여줘도 그 집과 인연이 맞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또한 돈을 벌려고 애쓴다고 원하는 만큼 벌리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아등바등 해도 내게 주어진 그릇만큼만 내 몫으로 돌아온다고 믿게 되었다.      


중개업이 많은 사람들의 직접적인 삶과 마주치다 보니 그 속에서 저절로, 공통적으로,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도 절대 안 되는 일이 있고,

심드렁해도 기어이 되는 일도 있고,

아주 좋은 사람이구나~ 했는데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무심히 일별하고 말았는데  이름만 떠올려도

오래도록 따스해지는 사람도 있고,


살아가는 데에는 참 묘한 철학과 인연이 존재하는 것 같다.


살면서 나랑 잘 맞는 사람들만 만나며 살 수는 없지만

안 맞으면 원래 안 맞는 관계라서 그러려니...

그도 나도 각자 다른 방식의 삶이 있겠거니  받아들이는 것도

중개업이 가르쳐준 삶의 이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생은 인연들로 엮어져 있으니 그 인연의 흐름에 운명을 맡기는 것도 사는 방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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