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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개사의 천태만상 현장일기(17)

어느 변호사와 어느 중개사의 말씨름

by 양콩

나름 분주하던 어느 가을날 아침.

인근 빌라에 월세 계약해 준 임대인의 배우자란 분이 전화를 했다.


"저기요~ 제 변호사님이 통화하고 싶다고 하니

전화 좀 부탁드릴게요~"


다짜고짜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해달라고? 변호사가 나랑 통화할 일이 있으면 우리 사무실로 전화하면 될 텐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전화하시라고 하세요~."


어머니가 아들 명의로 사서 오래전부터 계속 월세를 놓던 집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들이 업무수행 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고, 마침 이혼하려고 별거 중이던 며느리가 상속에 열을 내며 이 집을 탐낸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바 있다.


아무튼 그 뒤 손님이 방문하여 상담을 하고 있는데 변호사가 전화를 해서 나를 바꿔달라고 하자, 소속공인중개사가 "대표님은 상담 중이시다"라고 했더니 "끝나면 전화 좀 해달라"라고 했단다.


그런데 손님 집 보여드리고 계약 진행을 하느라 전화할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필요하면 또 하겠지 뭐.


30분 후에 이 변호사가 다시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짜증부터 냈다.


"대표님이신가요?

전화 달라고 했는데 왜 안 하십니까?"


"계속 바빠서 못했습니다."


했더니... 뭔가 분한 듯(?) 헛기침을 하더니


"저 ooo변호사예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전화 좀 해주시지.."


" 갑자기 계약까지 진행하느라 바빠서 경황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변호사가 말했다.


00 빌라 0동 0호 소유자가 사망했으니 이제 그 배우자인 000 씨에게 월임대료를 보내야 한다. 그러니 임차인한테 전화해서 배우자 계좌로 월세를 보내라고 전달하라...


사망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됐고 상속 관련 분쟁이 발생한 걸로 아는데 그새 잘 처리가 됐나?


"상속처리가 돼서 배우자 명의로 소유권이 변경됐습니까?"


"아직 진행 중이지만 남편명의 집이었으니 와이프한테 주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니 세입자한테 전달하세요"


당연하다고? 법적 분쟁에 당연한 게 어딨지?

설령 너무나 당연하다 해도 종결된 후에 임차인한테 전달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 그런 전달은 할 수 없다. 필요하면 직접 하라고 했다. 상속문제로 소송이니 뭐니 복잡한 상태인데 미해결된 상태에서 중개사인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이 변호사님이 물러서지 않았다.


"이보세요! 중개사가 돼가지고 그런 거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선을 넘으시네...


"중개사의 의무는, 계약서 작성 교부로 90% 이상이 끝이 나고, 잔금완납 입주로 나머지도 거의 소멸됩니다.

중개사가 계약기간 내내 누가 죽었고 누가 태어났고 그래서 월세를 이리 넣어라 저리 넣어라까지 할 의무는 없는데,,, 대개의 중개사가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온갖 서비스를 수행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소송 진행 중인 건에 대해 제가 변호사님 말만 듣고 지시대로 움직여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은 그럴 시간도 없네요!"


했더니... 다시 전화기 너머로 분노의 콧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혼자 씩씩대는 것 같더니


"그럼 임차인 번호를 모르니 계약서를 팩스로 보내주세요"


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거절했다.


"중개사는 의뢰인에 대한 비밀준수 의무가 있고, 개인정보를 보호해드릴 의무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한테나 계약서는 못 보내드립니다.


정말 사건을 수임해서 진행 중이시면 임대차계약서 정도는 소유자 가족분들께 제공받으시고, 소유자분들이 직접 임차인한테 전화하여 변호사님께 전화번호를 알려드려도 되겠느냐고 동의를 구한 후 처리하세요."


"아무한테나? 이봐요 내가 변호사라니까!!!"


"저는 중개사입니다.

아무리 변호사라고 중개사가 전화 한 통화만으로, 계약서를 제공해줄 의무는 없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럼 내가 공문을 보낼 테니 그때 계약서 사본을 보내줄래요? "


그래서... 네.... 그건


"공문을 확인해 보고 그때 결정하겠습니다."


뭐뭐뭐? 공문을 확인해 보고 결정?


"그럼요! 제가 계약서 사본을 제공할만한 필요가 있는지, 변호사님이 계약서 사본을 요청할 만한 진정한 권리가 있는지, 제가 공문을 보고 결정해야지요? 공문 내용도 보기 전에 어떻게 미리 약속을 합니까?"


했더니...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에이... 암튼 공문이 어디메쯤 걸어오는지 3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도착을 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무슨 연유인지 해당 빌라는 경매에 넘겨졌는데 임차인은 최우선변제보호 대상이라 보증금을 받고 안전하게 퇴거하였다.


그리고 낙찰자가 새로운 임차인을 맞춰달라고 하여 새 임대차계약도 체결하였다.


그러나 나는 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빌라 상속 문제로 어느 변호사와 논쟁을 하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같은 전문직업군인데도 공인중개사한테는 쉽게 대하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마인드가 저변에 깔려 있는 사회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변호사의 말은 왠지 가치와 무게감이 느껴지고 중개사의 말은 그저 그렇게 가볍기 한량없다.


'일반인들은 그렇더라도 변호사까지 타 전문직업사한테 명령하듯 하면 안 되는 거지! 각자의 전문영역이 있으니 서로 존중해 줘야지!'


관공서에서 몇 년째 무료법률 상담을 하고 있는데, 그날은 변호사와 같이 상담을 하게 되었다. 난 이쪽 테이블, 변호사는 저쪽 부스 안의 상담석. 한참 상담을 하는데 부스 안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럼 알아서 하세요!"


중개업 관련 법률 상담을 하다 뭔가가 엇나갔는지 변호사가 한참 소리를 질렀다. 민원실 안의 공무원들도, 그리고 나도 침묵한 채 귀를 기울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변호사라 다르긴 다르군. 나는 어떤 상담도 저렇게 냅다 소리 못 지르는데... 고분고분 응대하는데...


전화기를 탁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자 담당공무원이 달려가서 한참 뭐라고 하더니 전화번호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이건 중개사님이 전화 걸어서 상담해 주시겠어요? 중개업에 관한 것이라 변호사님은 힘드신 듯요"


그러자 옆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부동산에 관한 건 중개사님이 질문도 쉽게 이해하고 설명도 더 잘 되시겠지"


당연하다.

부동산거래에 관한 한 개업공인중개사 보다 더한 전문가가 없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는 사회 현실이 안타깝다.


덧붙여 아무리 직업으로 계급(?)이 달라지는 사회라도, 타직업군의 전문 영역에 대해 존중해주는 마음을 어느 정도는 가져주길 바래본다. 물론 나도 그런 중개사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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