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 있으세요?
단독주택 월세가 나와서 인터넷 광고를 했더니, 어떤 남자가 와서 집을 보다가 내게 물었다.
"자격증 있으세요?"
당연히 있지. 자격증 없는 공인중개사도 있나.. 당연한 걸 왜 묻느냐 했더니 그가 다시 말했다.
"와.. 부럽네.. 나는 두 번 떨어지고 포기했어요. 그런데 없어도 뭐 일하는덴 지장이 없잖아요."
어디선가 중개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중개보조원이거나... 무등록 컨설팅.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다시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파트 이런 건 수수료가 얼마 안 돼서 저는 빌라만 해요.
빌라는 한 건만 해도 수수료가 크잖아요."
개업공인중개사들은 어떤 중개대상물을 거래하든 법정 중개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무자격 컨설팅업자나 자격증을 대여해서 운영하는 자들은, 쉽게 팔리지 않는 물건을 팔아주는 대가로 중개보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용을 받는다.
예를 들면 1억 5천만 원에도 잘 안 팔리는 빌라를 1억 8천만 원에 거래를 성사시키고 2000만 원을 컨설팅 및 보수로 챙기는 수법이다. 1억 8천만 원의 중개보수는 부가세 포함 880,000원이다.
그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너 힘들게 공부해서 자격증 따 가지고, 혹시 자격증 문제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며 소심하게 일하지?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돈도 더 잘 벌고 자유롭지'
몇 년 후, 인근에 빌라단지가 들어섰다.
물건을 찾는 손님이 있어 분양사무소를 방문했는데, 누군가 과하게 반겨서 쳐다보니 그 남자였다.
그 남자 P 씨는 수개월에 걸쳐 분양이 완료되자 분양사무실 겸 거주지로 쓰던 빌라를 매매의뢰 했다.
중개보수 외 넉넉히 챙겨주겠다고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후 P 씨는 지인에게 빌라를 매도했다며 월세를 놔달라고 했다.
새 빌라 주인도 잘 부탁한다고 방문하였다. 계약이 체결됐고 잔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잔금 이튿날 아침, 빌라 주인이 전화를 했다.
"P 씨가 중개보수를 왜 부동산에 줬느냐.
나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고 하면서 다시 돌려달라는데요?"
빌라 주인은, P씨도 부동산을 하는 사람이라 하니 P 씨의 말이 맞는 것 같다며 그에게 중개보수를 건네주길 원했다. 나는
"물건 의뢰를 받았을 당시 중개업을 하고 있다는 말도, 공동중개라는 말도 들은 적 없습니다.
P 씨는 처음 매매로 내놨을 때도 중개보수를 주겠다고 했고요. 그리고 중개보수를 받아가려면 계약 시에 개설등록번호와 인장을 들고 동석했어야 합니다. P 씨가 등록된 개업공인중개사가 맞나요?"
고 항의했다. 10분 후에 P 씨가 콧김을 날리며 전화를 했다.
"나는 여기저기서 오랫동안 부동산을 하고 있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하면 부동산들이 다 알아서 부동산비를 챙겨줬어요. 도대체 당신은 부동산 룰을 알고나 있습니까?"
아직도 어딘가에서 컨설팅사무소를 차려 일하거나 혹은 어느 중개사무소에 빌붙어 똠방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물건의뢰를 할 당시에는 세가 빨리 빠지기를 바래서 사심이 없었다가, 막상 잔금까지 완료되고 나자 한번 우겨나 보겠다는 심보다.
"현재 완성된 중개로는 계약부터 잔금까지 그쪽에서 받을 권리가 없으니, 일단 입주한 세입자를 다시 내보내세요! 짐 다 빼게 한 다음에 자격증 사본과 등록인장 들고 와서 계약서를 쓰고 다시 입주시키세요! 물론 세입자에 대한 보상은 그쪽에서 다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대로 된 수순을 밟읍시다. 그 형식을 취하면 중개보수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P씨가 개발 소발 막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 여자가 미쳤나? 이사 들어간 사람을 어떻게 내보내?
수수료 받겠다고 이사비를 두번 들게 만들어? 그게 말이 돼? "
당근 말이 안된다. 그러나 중개할 자격이 없는 자가 중개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더 말이 안된다.
난 미치지도 않았다. 월세요율이라 몇십만원 안되는 중개보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중개사의 보수를 가로채려는 무등록자에게 내 권리를 뺏길 수 없을 뿐이었다.
그것이 개업공인중개사로서의 내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P씨의 말에는 우리 중개시장의 우울한 현실이 담겨 있었다.
'자격증이 없어도' '등록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중개업으로 먹고 살게 해주는 대한민국의 너무나 관대한 정책과 풍토. 공인중개사 자격증 제도가 뿌리내린지 30여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무자격자들이 종횡무진할 수 있게 방관한 탓이다. 실제 지방 중소도시 거래건수의 많은 비중이 이런 무자격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얼마 전 빌라나 오피스텔을 중심으로 전세사기가 극성을 부렸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개발 소발 욕을 해대는 P씨가 '입만 살고 싸움은 못하는' 여자들만 있는 사무실로 쫓아올까봐 겁이 나서 딸국질이 쉴새없이 터져나왔지만, 나름 통쾌했다. 법과 원칙 안에서 싸우는 일, 그것이 내가 지켜야 할 중개사의 자존심이었다.
"얼마든지 줄테니 오라~.
대신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여 오라~"
그뒤로 10년정도 흘렀다. 빌라주인은 그 사건 이후에도 예상과는 달리 나에게만 전속으로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개발소발 욕 잘하는 P씨는, 조금 떨어진 상가에서 축산도매업을 하고 있다. 칼 들고 고기를 썰어대거나 저울에 올려 눈금을 확인하는 모습이 꽤 잘 어울린다.
그래 P씨! 직업 선택 잘했어~.
칼 들고 째려보거나 맛없는 부위를 썰어줄까봐 나는 그 고깃집에는 안 간다.
아파트든, 빌라든, 오피스텔이든 계약할 때는 반드시 '등록된 공인중개사'가 맞는지 확인하자.
그것이 내 소중한 재산을 지키는 첫걸음이다.